나는 한 쌍의 잉꼬를 기르고 있다. 기른다기보다 거의 방임상태이다. 그것이 오늘 아침에 한꺼번에 죽어 버렸다. 병사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다. 따라서 정사도 아닌 타살과 같은 아사(餓死)였다. 참으로 애처로운 죽음이었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어떠할까.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모든 생물 가운데 인간만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체험으로 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고(苦)요 산다는 것은 숙명적으로 노병사(老病死)를 함께 걸머지고 있다. 어떻게 죽거나 한 번은 죽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은 지금 살고 있다는 것만큼 사실이다.
무릇 종교는 산 자의 입을 빌려 이 죽음을 미화(美化)하는 데까지 한다. 생사고를 면치 못할 중생들이 비단 이부자리 속에서 곱게 죽는 그 죽음에도 그만한 고통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 해탈(解脫)은 생사의 고(苦) 다시 말해서 죽음의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과연 죽어야 할 인간이 이 영원한 문제 앞에 몸부림을 친다. 마치 육신의 고통을 잊으려고 마취제를 쓰듯 의식적으로 죽음이라는 생각을 외면하고 산다.
유복자를 잃고 비탄에 빠진 어떤 과부가 불타에게 어찌하면 이 괴름을 잊을 수 있는가 물었을 때『아직 사람이 죽어본 적이 없는 집을 세 집 찾아서 쌀 한 홉씩을 얻어 오면 과부의 괴롬을 잊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과부는 쌀 한 흡도 얻어 오지 못하였다. 사람이 죽어본 적이 없는 집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 그 과부는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정처 없이 떠나는 길은 외롭고 슬프기만 하지만 알고 지청해 가는 길은 안심도 될 것이다.
이따금 내가 어떻게 죽을까 미리 생각도 해 보지만 그것들은 다 쓸데없는 일이다. 어떻든 행복한 죽음 자체는 있지 않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진주 같은 눈물 한 방울과 미소를 띠우고 죽었으면 싶다. 자연에의 탈락이 죽음은 아니다. 애써 개화(開化)하려 해도 낙화하니 죽어서 안식하는 영혼의 소망을 믿을 따름이다. 어느 교를 찾아서 물어봐도 대답은 매한가지다.
『사람은 원래 죽지 않았다. 항상 젊음이 있을 뿐이다. 그때 미밍구궁구라는 한 노파가 있었는데 그녀에겐 누가 이앙구라는 손녀가 있었다.
이 노파가 인생에 지쳤을 때 물가로 나가서 목욕을 하자 주름살이 펴지고 추악한 피부는 벗겨지고 아름다운 흰 살결이 돋아났다. 소녀가 노파를 보자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노파는「왜 우느냐 나는 네 할머니다」고 달랬으나「아니야 아니야 내 할머니는 그런 젊은 꼴을 하고 있잖아」하며 더욱 울어댔다. 노파는 하는 수 없어 물가로 돌아가서 거기에 벗어 던진 허물을 다시 주워 입고 돌아왔다.
소녀는 자기의 옛날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런데 노파는 손녀더러「너희들 인간은 이후로는 죽으리라」하고 죽었다.
이로부터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됐다는 뉴기니아 어느 종족의 죽음의 기원을 신화로 들어 봤다. 죽음은 그 어떤 상태에 놓여지는 것이다.
그 상태에 있기는 간단한 것이다.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에 대한 상상(想像)이 훨씬 우리를 무섭게 한다. 이별이다. 영 볼 수 없는 슬픔에서 관(棺)을 부여잡고 통곡을 한다. 그러나 조종(조鍾)은 울린다. 노르만디의 플로벨 작에「순박한 마음」이 있다.
페리시따는 불우한 시골 처녀지만 우직하고 순박한 마음씨를 가졌다.
어느 중년 미망한 집 식모로 들어갔는데 그 부인은 절대로 자기의 아이들에게 키스를 못하게 한다. 페리시따는 괴로운 일이지만 그런 대로 그들을 보살펴 주는 것이 큰 위안이 됐다. 자기 딸처럼 사랑하던 주인의 딸 비르지니는 자기를 떠나 수녀원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녀는 부인을 원망했으나 별 수 없었다.
그런데 비르지니가 폐렴에 걸렸다. 기숙사를 방문한 페리시따의 귀에 이상한 종소리가 아 그것은 조종이 틀림없다.『저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일 테지』하고 들어갔다.
그때 한 수녀가 고개를 내저었다.『지금 막 그 사람은 운명했습니다』고 말한다.
성 레오나르의 조종은 계속 울려퍼졌다. 두 밤을 망자와 새우며 똑같은 기도를 되풀이한다. 움푹 패인 눈에 거듭거듭 입맞춘다. 그녀는 미르지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금발이었다. 그녀는 머리칼 얼마를 잘라 품 속에 깊이 간직했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애절한 광경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그것은 살아 남은 사람에게 크나큰 비극이다.
냉엄한 현실이다. 죽는 차례는 없지만 너 아니면 나다. 그러니까 우린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왕 죽을 바에야 하느님은 하루만 더 좋은 유언이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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