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당신 아버지가 확인을 하면 다시 재고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또 부당한 신고를 한 죄로 내가 아버지를 고발해야 할 걸』
『아버지는 잘못 알고…』
『쓸데없는 소리 말게. 바로 당신 아버지가 반 시간 전에 기회가 왔다고 전화를 했어』
청년은 돌아서서 창문 하나를 쏘아보았다. 덧문도 닫히지 않았고 불도 꺼진 창문이다. 청년은 몽유병 환자처럼 피에르에게로 걸어왔다.
『난 집에 돌아가지 않겠어요. 아 신부님, 이럴 수가…』피에르는 청년의 어깨를 잡았다.
『어린애 같은 소릴 하는군.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써 보게. 그리고 밖의 사람들도 저버리지 말고…』
피에르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 어린애 마음을 항상 간직해 두게. 일생 동안!』
『오늘 밤엔 집에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집에 와서 자지』
경찰의 일이 끝났다. 뽈렛트와 추위에 떠는 애들과 쟈꼬도 친구들과 함께 떠났다. 가구는 다시 한 번 길바닥에 쫓겨나고 불 핀 화독이 아직도 벌겋다.
순경들은 다시 자동차에 올라타고 발동소리가 요란하게들렸다. 파출소장은 사건 처음부터 장승처럼 서 있는 피에르에게 다가갔다.
『당신을 잡아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시오…부끄럽지도 않소? 신부가 공산당이 되다니?』
『첫째로 나는 잡혀갈 하등의 이유도 없고 둘째로 나는 공산당이 아니오. 도대체 이 빈 헛간이 공산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뭐라구?…아!』
소장은 숨이 막혔다. 자기 하는 일이 절대로 정당하다고 믿었던 그다.
피에르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상대방도 할 말이 없었다.
파출소장은 자동차를 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공산당 신부라니 신부가… 공산당 신부!』
잠시후에 거리는 다시 잠잠해졌다. 불어치는 바람과 벌겋게 단 화독만이 남았다.
피에르는 눈을 감았다. 숨이 막히는 듯 가슴이 조여왔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이 한 주가 길고 어두운 밤이 아닌가. 고뇌와 배반과 악몽에 찬 끝없는 긴 밤! 제세마니의 밤….
⑧ 진복자
피에르는 잠이 깼다. 패배의식에 찬 그는 입맛이 씁쓸했다. 이 장소, 이 하루가 마치 물 빠진 항구 모양 황량하게만 느껴졌다. 일요일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느껴지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오늘 일요일은 월요일 아침 맛이다. 함께 자던 청년을 깨우지 않고 피에르는 홀로 막다른 골목길에 나섰다.
바람이 불어 머리칼이 날린다. 공원의 앙상한 나뭇가지도 널어놓은 빨래들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똑같은 바람. 어제 밤 눈물을 뿌리던 그 바람이…. 바람은 정말 어린애 같이 무심하구나.
피에르는 뽈랫트와 쟈꼬가 행복하게 살던 곳 지금은 불타 버린 방 앞에 잠간 발길을 멈추었다.
루이네 방을 지나가며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루이는 한 손으로 안경테를 치켜올리며 손가락으로 침칠을 해 책장을 넘기고 있다. 지금 꼬마 알랭에게 얘기책을 읽어 주고 있는 중이다.
알랭은 한 손으로 고양이를 만지며 또 한 손에 커다란 빵을 들고 루이가 읽어 주는 책을 열심히 듣고 있다.
『그때 대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항복해라 아니면 폭파해 버리겠다!) 대답 대신…』
『그 얘기 참 재미있군요!』
피에르는 루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지만 그 얘기는 다음에 계속합시다. 지금 난 알랭이 필요하오. 얘 꼬마야 이리온』
피에르와 알랭은 손에 손을 잡고 걸었다. 선술집 뒷문으로 그들은 들어갔다. 의자를 묘하게 포개 쌓아올린 품이 마치 서어커스에서 곡예사가 이제 막 재주를 부리려는 순간 같았다. 주인은 커피 끓이는 통을 닦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피에르는 단 한 마디 인사를 건네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뚱뚱한 주인은 커피 한 잔을 따르고 설탕을 한 개 넣어서 피에르 앞으로 내밀었다. 또 한 잔을 만들더니 이번엔 설탕 두 개를 넣어 자기 앞에 놓는다.
『고맙습니다.』
피에르가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알랭이 돌아가지 않는 혀로 흉내를 냈다. 뚱뚱보는 스탠드 너머로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이곳에 온 지 6개월이 되지만 피에르는 아직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잠깐 기다려 봐라!』
주인은 다른 손잡이를 눌러 커다란 잔에 코코아를 가득 채우고 설탕 세 개를 넣었다. 그리고 스텐드에서 빠져나와 조그만 테이블에 놓으며 알랭에게 말한다.
『조심해 뜨겁다! 여기에 크로아쌍 빵을 하나 적셔 먹어라…』
『발따르 씨』
피에르가 불렀다. 이 주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어젯밤에 일어난 일을 아시지요?』
『알지요. 그리고 여기 무얼 요구하러 온 것도 알고』
주인은 눈을 내려뜬 채 대답했다.
『난…』
『여보시오 당신네들은 날 못된 놈이라고 생각하는 걸 알고 있소.
그러나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걸 알면 어떻게 하겠소? 모두 이상한 얼굴을 하겠지! 요전날 당신이 내게 얘기할 때 내가 못 알아들은 줄 알았겠지. 그리고…이 개새끼가…했을 거요?』
『난 아무 소리도 안 했소.』
『좋소 좋아! 당신 친구들을 다시 집 안에 넣겠소. 마누라가 뭐라고 할 테지만 떠들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떠들라지. 무엇인지 변해질려면 누군가 시작을 해야 할 게 아니오. 이것은 당신의 의견이겠다?』
『그렇소.』
『그러나 수리관계는 자기네가 해결하도록…꼬마야, 코코아 더 줄까? 잔을 이리 가져온…보험회사가 지불하겠지만 언제나 그 돈을 내겠소?』
『나도 모르겠소.』
『글쎄 그걸 모른단 말이오. 그렇다고 내가 그 돈을 꾸어줄 순 없지 않소. 은행가도 아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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