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예술가들은 봉사하는 사명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마 코웃음 칠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어 버리고 살아온 말이고 마치 멀리 버리고 떠나온 고향처럼 다시 돌아갈 길이 막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살된 자유
그러나 현대의 예술가들은 어느 시대의 예술가들 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가 말살되고 강요 당한 봉사는「노예」이며 권력에 아부하거나 야욕에 사로잡힌 봉사는「어용」이라는 사실이다.
참으로 성실하고 진지한 예술가일수록「노예」와「어용」을 증오하고「자유」와「순수」를 예술의 생명으로 여기며 그것을 절대시하는 것이 현대 예술가의 특이성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것은「봉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개념 같이 보인다.
근대 예술사
사실에 있어서 근세 이후의 예술사는 봉사를 거부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과 권위는 자연적이건 초자연적이건 간에 거부하고 부정되어야 했다.
전통적인 제약에서 종교적인 구속에서 인간성을 해방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전취하는 것이 그들의 높은 이상이었다.
그뿐 아니다. 예술은 어느 무엇보다도 순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은 어떠한 것을 위해서도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은 독자성 자율성을 요구했다.
반항하는 현대 예술
근대사의 과정에서 실제로 이 두 가지 요구는 실현되어 갔으며 그 결과로 도달한 것이 현대 예술가의 위치인 것이다. 한 디로 말하자면 현대 예술은 반항하는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예술가는 고독하게 되었고 작품은 이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본래는 진과 선과 미는 조화를 이루고 일치된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미는 진과도 선과도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즉 예술은 윤리적인 것을 떠나야 되고 형이상학적인 것과도 단절된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 것을 가지면 불순한 것이고 굴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술은 모든 봉사적인 사명을 완전히 벗어 버린 셈이다. 예술은 이제「예술을 위한 예술」이 되었다. 예술은 모든 인간적인 옷(衣)을 벗어 버렸고 인간 또한 예술을 향유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현대인은 사막처럼 외롭고 벌거벗은 것처럼 쓸쓸하게 되었다. 인간 불재의 예술에서 예술 불재의 인간 사회가 생겨났다.
예술은 어디로
나날이 저속해지고 기괴해지고 부도덕해지는 현대 예술 풍조를 보고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의 인사들은 이런 생각을 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술이 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진리에 봉사하고 인간에 봉사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안이한 독단이다. 그리고 비현실적이고 역사를 떠난 추상적인 생각이다.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것이 예술이고 보면 이 환경은 임의로 전후 좌우로 옮겨 놓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근대 초기 이래로 모든 분야의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제대로 불변의 상태로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예술가들이 자유와 순수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예술을 새로운 지평선에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으로 예술이 확고부동한 태세로 봉사해 오던 가치와 대상 그 자체에 동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반이 근본부터 흔들렸으니 이제 예술은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이래서 그들은 많은 진통과 방황 끝에 새로운 예술을 개척하는 데 빛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미래에 사는 예술가
말할 것도 없이「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술은 예술을 넘어가는 더 높은 것을 위해서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봉사할 사명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은 높은 차원에서 종교적인 신앙 세계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러나 예술가는 참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참으로 창조하는 것밖에는 봉사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가가 봉사하는 독특한 길이요 방법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봉사는 미래를 향한 것이라야 하고 그들의 영광도 미래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무거운 십자가요 고민이다.
이처럼 미래에 살아야 할 그들에게 성급하게 근시적인 봉사를 기대하는 것은 그들의 십자가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노예」또는「어용」으로 이끄는 길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강은 결코 역류하지 않는 것이다. 지나간 연안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감상적인 애착보다는 앞으로 다가오는 풍경에 눈을 돌려야 한다. 만일에 예술가인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자라면 그가 당면한 최대의 봉사는 그리스도교적인 내용을 작품에 담는 것이 아니라 우선 사이비 예술가의 테두리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그는 크리스찬이기 때문에 예술의 자유와 순수, 그리고 봉사를 더욱 길고 높은 안목으로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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