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혼돈에서 시발하여 결국 혼돈으로 종착하는 것일까?
태초에 조물주께서 혼돈으로부터 우주만상을 창조하신 후『보기에 좋았다!』라고 하신 말씀은 미에 대한 최초의 발견이며 예의이며 인간에게 상속된 예술의 본능이라 할 것이다.
■미의 발견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보기에 뭔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주는 예술이란 명색의 양상을 대할 때가 흔히 있다. 실은 이런 것이 예술이요, 이런것을 일삼는 사람들을 예술인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것을 혼돈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계에서도 특히 연예풍토에 적지 않음을 볼 때 연예인의 한 사람으로서 심히 안타까웁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예술이란 참다운 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요구일진대 이 욕구는 곧『보기에 좋았다』라고 하신 조물주의 그 환희에 참여하려는 것이며 완전한 미의 창조자이며 발견자인 조물주를 모방함이요 미의 재발견을 위한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술은 구원한 소망
그러므로 예술은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한 소망이며 생활이 되어 만인의 공명과 애호 속에서 그 명맥이 서야 할 것이니 이를 위한 사명을 지고 앞장선 기수를 이름하여 예술인이요 또한 생활과 예술을 요리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연예인이다.
따라서 오늘날 연예人은 언제어디서든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연극을 하거나 영화를 하거나「래디오 드라마」를 하거나 우리의 생활 속에 직달되지 않는 것이 없다.
■연예인은 우리의 가족
심지어는 래디오나 TV와 같은 매스콤을 통하여 생활의 본거지인 안방에까지 아침 저녁 출입하는 사이가 되고 있는 연예인은 모든 가정에 동거하는 친숙한 얼굴이며 또한 가족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연예인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자신도 모르게 공중의 생활권에 참여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대한 바 공중과 연예인과는 마치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전연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애당초 연예라는 것은 공중을 상대로 기예를 공연하는 게 원칙이므로 관중이 없는 공연이란 있을 수도 없었다. 연예를 공제한 생활 또한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공중과 연예인은 공존의 묵계로서 반드시 예술이라는 건실한 매개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공중은 연예인에게서 바라는 바 예술에 있어야 하며 연예인은 공중에게 예술로써 봉사해야 함이 상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양자의 사이에 원만한 평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문화는 발전을 기할 수 있으며 안정되고 명랑한 사회가 이룩되었던 사실은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
■공중과 연예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연예인과 공중과의 사이에는 부단한 기만과 불신과 혐오에 얽혀지고 있는 상황에 직면할 때가 적지 않다.
이는 예술의 퇴폐와 사회의 불안을 뜻하며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능마저 여지없이 멍들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연예 분야에서도 가장 우리의 정서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영화만 해도 매년 2백여 편이 생산되고 50여편의 외화가 수입되어 도시를 비롯하여 방방곡곡까지 상영되고 있다. 적어도 이런 영화 가운데 3ㆍ4할이라는 막대한 편 수가 저질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우리의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무서운 의미이다.
이런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연예인으로서의 양식은 아랑곳 없으며 다만 공중을 어떻게 기만하여 자신의 수지타산을 맞추느냐 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악덕 장사치에 불과하다.
■공중을 기만하는 예술
이 같은 사례는 비단 영화계뿐만 아니라 가요계에도 비일비재하다. 사회의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가사나 작곡을 공공연히 만들어내는 것으로 입에 풀칠을 하려 하며 의젓이 연예인의 대열에서 행세하려는 실정은 참으로 밉다기에 앞서 불쌍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디서 표류해온 족속인지도 알 수 없는 기괴망칙한 행색으로 북을 치며 나팔을 불며 소리를 지르며 몸을 흔들며 한창 천진난만하게 성장하는 청소년들을 거의 최면술적으로 열광케 하고 있는 무리들이 연예인의 탈을 쓰고 날뛰는 상황은 실로 옥석을 분별할 수 없는 혼란이요 혼돈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지금은 무엇인가 있어야 할 때이고 어떻게든 돼야 할 때임을 절감한다. 그러기에 이제 가톨릭 연예인은 진실한 미의 극치를 구명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예술의 가치성을 재평가하여 만인들과 더불어 예술의 낙원을 이룩해야 할 사명을 지고 기꺼이 봉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시고『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예술의 본원 즉, 하느님의 세계로 向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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