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의 이름이 예관수라는데 미사는 가벼운 실망을 느꼈다. 일주일 간격으로 공수(空輸)되어 오던 예관수의 르뽀는 미사의 마음을 원시의 대륙으로, 미지(未知)의 오지로 치달리게 했었다.
미사의 눈앞에는 전인미답의 원시림에 도전하는 사나이의 구리빛으로 빛나는 살갗이 떠올랐고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속에 뛰어나온듯한 사나이의 부리부리한 두눈 속에서 지글거리는 불꽃을 보기도 했다. 형용사와 부사를 극도로 제한한 남성적이면서도 정확한 그의 문장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미사에게 있어 예관수란 이름은 원시림에 도전하는 사나이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온순한 미소를 머금고 앉아있는 햇볕에 쪼들린것 같은 빈약한 체구의 사나이가 예관수라니…
역시 인생이란 꿈꾸어 볼 만한 값어치도 없는 것이라 느껴졌다.
렌트겐을 찍기 전에 몇가지 반응검사를 받으라고 유 박사는 말하고 책상위의 벨을 눌렀다.
간호원이 들어와 미사를 검사실로 데려간다.
소변검사와 폐지스토마 반음검사는 모두 마이너스였다.
다시 원장실로 오니 유 박사는 진찰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의 아침진찰이 지금부터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미사는 유 박사를 따라 진찰실로 들어갔다.
진찰실에도 간호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요즘에 느껴지는 증세 병력(丙歷) 등을 물은후 청진기로 미사의 가슴을 진찰했다.
『왼쪽폐의 상위부군』
유 박사는 미사에게 말한다기 보다는 곁에있는 간호원에게 말했다.
『렌트겐을 찍어봐야 알겠지만 병소(丙巢)는 꽤된것 같은데…』
진찰실에서 다시 원장실로 나오면서 유 박사는 말했다.
『폐에는 자각증상이 없기 때문에 이게 탈이란 말이야. 병 진행이 어지간히 된 다음에야 발각이 나곤 하는데 이렇게 되니 자연 만성질환이 돼버리곤 해요.』
미사는 담담한 심정으로 유 박사의 말소리를 들었다. 마치 남의 말을 듣는것 같았다.
『한미사씨, 실례지만 전에도 혹시 폐를 앓아본 적이 있습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로서는 뜻밖의 새 사실이에요.』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을 당한분 같지가 않으니 말이요. 허허허. 나는 여기서 수많은 환자들 대해 오고 있지만 한미사씨 같은 환자는 처음이에요. 태사장이 극구 찬양하는대로 한미사씨가 남유달리 이지적이기 때문인지 어쩐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묻는거요.』
『요즘엔 약이 좋아서 문제 없다면서요?』
『설마 미사씨는 결핵을 정말 감기정도 밖에 안되는 병이라고 얕잡아 보시는건 아니시겠지?』
『얕잡아 보는건 아니지만 하던 일을 중단하면서까지 약을 먹어야 할까 그 문제가 저에게는 좀 더 심각해요. 박사님, 제가 내일 당장 죽으리만큼 심각한 증센가요?』
『렌트겐을 찍어봐야지』
『저는 약간 노곤하고 식욕부진이라는 점을 빼놓는다면 나와서 움직이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는데요. 렌트겐 결과에 따라 괜찮으시다면 일을 하면서 치료할수 있도록 박사님께서 편리 좀 봐주실수 없을까요? 전 집안에서 아무일도 안하고 틀어박혀 있다간 병이 낫기는 커녕 더 악화할 것만 같아서 그래요.』
그 대목에 가서야 비로소 미사의 눈빛에는 제법 심각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누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랬소. 과로를 피하라는 거지. 마음을 즐겁게 가지고 충분한 영향섭취를 하면서 알맞는 운동은 오히려 필요합니다. 미사씨, 내가 좋은 처방을 내려 드리겠소. 무엇보다도 미사씨 건강을 회복시키는데 기여할 묘방이 있다오.』유 박사는 싱끗 웃었다.
『그건 파스도 나이드라짓도 스트랩도 마이신도 아니오. 그건 오로지 사랑이오 미사씨 연애를 하십시오!』
미사는 상상밖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더니 이어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이 된다.
『어떻소. 내 처방이 과연 명의(名醫)다운 처방이죠?』
유 박사는 예관수 쪽으로 몸을 돌리며 흔쾌하게 웃었다.
예관수는 과연 그렇다는 듯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애? 흥! 미사는 속으로 콧방귀를 튕겼다.
누가 연애따위를 다시 할까 보냐.
미사의 머리속에는 다시금 떠올리기 싫은 한 사나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나이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그렇소. 나는 이용했소. 큰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찮은 여자의 순정 따위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미사를 통해서 나는 한장군에게 접근했소. 내목적은 한장군이었지 한미사는 아니었소…>
미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지는 것을 보자 유 박사는 당황하면서 속으로 한미사의 이지(理智)는 병적이라고 생각했다.
한미사에게는 유모어에 대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고 유 박사는 생각했다.
『자, 그럼 두 분께 렌트겐을 찍어달라고 요청하겠소. 예 선생은 렌트겐이 3개월 동안이나 지연되었소. 나는 내 환자에 대해서는 독재자이기를 바라지요. 내 명령에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겠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