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가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상태에서는 이데올로기의 극복이 문화영역에서 논의되게 마련이지만 민족으로서의 자기완성이 엄연한 과제로 남아있는 우리의 미급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민족주의의 내부적 성장에 의한 문화의 향상은 새로운 창조적 도전에 직면한 것으로 파악된다.
날로 혼미해져가는 민족얼을 더욱 마멸시키고 주체적 문화풍토를 파탄시키는 구실을 하는데 세계주의의 달콤한 유혹이 있다. 세계 조류에 발맞춰 인류문제를 돌봐야 한다 하며 혹은 민족주의의 편협성과 부당성을 지탄하며 세계주의를 인식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의 신문화(新文化) 반세기는 민족주의 문화의 창달에 매우 등한해온 일면이 없지않다고 본다. 막연하게 민족문화라면 모르나 민족주의문화는 제대로 창조되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의 보편성을 외면하고 역사를 돌보지 않은채 스스로 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사이비세계주의에 침식돼 버린 식민지문화의 비극을 맞이한 것이나 아닌지 모른다.
일찍이 쑨원(孫文)이 갈파한 것처럼 세계주의란 학대받는 민족이 거론할바가 아님은 물론 피압박 민족은 우선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기 전에 탈이데올로기를 말할 자격이 없다. 더욱이 우리의 민족사적 현실은 민주화 근대화를 통한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있음에 비추어 민족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문화의식이 요청되고 있다. 「신동아」 9월호의 특집 「한국민족주의의 제문제(諸問題)」에서 보인 이용희 고병익 이한기 천관우 조기준제씨의 글은 그 해답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될수 있다. 자립경제와 자주문화 그리고 복지사회의 실현은 시민 민족주의와 저항 민족주의의 틀을 넘어서는 현대민족주의의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단일민족주의의 시급한 완결과 함께 우리도 이제 다민족주의(多民族主義), 복합민족주의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이용희 교수의 논지는 주목을 끈다.
한편 그동안 한국 민족주의의 전개가 민족내부에 있어서 탈봉건ㆍ전근대성을 배제하지 못한채 더욱이나 일제하 민족주의 지도자는 대체로 대중과 이해를 달리하는 계층이면서도 민족의식의 일치점에 도달한 사실에 그 특성이 있다. 조 교수의 지적과 함께 민족통일을 앞두고 우리가 체제상의 압도적인 우위를 과시하자면<공포 아닌 자유, 궁핍 아닌 번영, 부정부패 아닌 사회주의 국제상의 고립 아닌 유대> 등이 북에 비하여 압도적인 우위에 서야 한다는 천관우씨의 결론은 다시 조 교수의 결론과 결부된다. 즉 누가 민족의 이익과 민중의 이익에 보다 충실한가 하는 다시 말하여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민족국가의 건설이야말로 한국 민족주의의 큰과제인 대중이익의 극대화라는 문제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도대체가 민족주의란 민족현실의 절박한 욕구를 해결하는 이상의 것일수가 없다. 예컨대 영국인 애드리언 헤이스팅스 신부에 의해서 처절하도록 실감있게 폭로된「모잠비크 학살의 현장을 가다」(월간중앙) 에서 포르투갈 식민정책의 악마적 단면을 읽게 된다.
『군인들은 소리를 질렀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여라. 이는 상부의 명령이다. 살아남는 놈은 반드시 우리를 욕할테니까 모두 죽여 없애야한다」 20세기 아프리카 식민지 역사에 이와같이 가공할 광경은 일찍이 없었다.』
모잠비크의 피비린내나는 살인적 현장이 세계에 남아있는 한 민족주의의 불길은 꺼질수 없다는 느낌을 지니게 한다. 그런 점에서 백낙청씨의 「문화연구의 자세와 민족문학」에서 작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연대의식의 입장을 강조한 것과는 좋은대조를 보인같은 「월간중앙」지에 발표된 홍사중씨의 「변절정론(變節正論)」은 지식인의 방관자적 입장을 드러낸 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홍씨는 동지(同誌) 7월호의 「변절이론(變節異論)」에 이어 이 나라 지식사회의 풍토를 거듭 오도하고 있다. 비판의식이 결여된 지식의 논리 유희 치고는 반문화의식을 조장하고 있으며 지식인의 존재가치를 솔선하여 비굴하도록 훼손시킬 뿐이다.
오히려 명멸해가는 역사의식을 되살려 바람직한 문화양식으로 정립해나가는 일이 온인류를 위하는 우리 지식인의 참된 길이 아닐것인가.
그릇된 단편적인 세태에 쉽사리 체념하는 입장이라면 차라리 불투명한 言_행사를 보류하는 용단이 아쉽다. 공범의 곡예는 변절자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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