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강요 이후 종교계에도 불어닥친 황국 신민화 운동에 대해 성직자들은 신앙자유를 내세워 항의해보았지만 일제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 교활한 몸짓으로 올가미를 죄워갔고 살기등등한 그들의 눈에 착한 성직자들의 항변쯤이야.
이래서 성직자와 교회는 매일같이 사사건건이 트집을 잡아 덤벼드는 경찰과 충돌도 해보았지만 결국은 참기 어려운 모욕과 수모를 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1938년부터 총독부는 이제껏 우리말로 하던 미사강론을 일본말로 하도록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아직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이라 대부분 외국인 신부들이 다스리고 있던 교회에 대해서는 그 강요가 노골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조선인 신부나 신자들에게는 훨씬 강압적이었다.
이때부터 주일 미사 때마다 성당 뒷쪽에는 고등계 형사가 도사리고 앉아 신부의 입을 감시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런 현상은 도시에서보다 시골로 갈수록 노골적이었다.
그러나 외국신부들이나 한국신부들은 일본어를 안다해도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우리말 강론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형사들은 이를 트집잡아 시비를 걸거나 심하면 연행하여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1936년 신사참배로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일제의 종교탄압은 조선어 강론 금지에 이어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서양신부들의 추방 내지 감금으로 줄거리를 있다가 소위 대동아전쟁과 함께 극을 이룬다.
주교나 신부가 지방교회 순시를 가거나 공소에 나가려면 미리 한 달 전쯤부터「여행계」를 관할 주재소나 경찰에서 제출해야 한다.
여행계는 즉시 총독부 치안국을 거쳐 순시지역 해당 경찰로서 통보되고 이 일정에 따라 주교나 신부 뒤에는 언제나 형사가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신부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과 충돌을 피하고 순시를 무사히 마치기 위해 신경을 쓰고 주의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방에 도착하면 먼저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경찰서장 군수 등 주요 관리를 예방(?)한 다음에야 성당을 찾아야 했다.
성당에 가서도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을 국기게양대 앞에 도열시켜 국기게양과 국민의례를 하고 황국신민화 운동에 대한 일장훈화를 해야 한다.
이렇게 까다롭고 마음에 없는 절차를 마친 다음에야 성무를 집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의식에서 절차가 틀리거나 국민서사, 일본국가「기미가요」를 제대로 봉창하지 못하면『일본어가 서투르다』고 트집잡아 문책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어지간한 뱃장이 없이 순시를 제대로 마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주교나 신부 뒤를 쫓아다니던 형사가 당돌하게도 예식을 중지하라고 성당 입구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는 판이니 말이다.
이런 일이라면 누구보다 당시 경성교구장이던 노기남 주교가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교구장에 올라 지방순시에 나서면 그때마다 으례 한두 차례 부화가 치미는 곤욕을 치루어야 했던 것.
1943년 10월 황해도 일대 순시에 나서 송화에 도착하자마자 왜경(倭警)은 장난질을 시작했다.
송화읍에 들어서자 난데없이 방공연습 사이렌을 불어대 주교가 수수밭 고랑으로 기어들어 숨게 만든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 계속 고백성사를 주려고하면 불어대고 미사때 불어대는가 했더니 저녁에 한숨 돌리고 저녁상을 받자 또 불어댔고 이튿날 아침 미사 때에도 어김없이 불어대 화가치민 노 주교는 제의를 입은 채 방에 버티고 서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의방까지 찾아온 형사는『왜 빨리 피하지 않느냐』고 재촉해댄다.
주교가 제의입고 허겁지겁 밭이랑 사이로 엎드리는 꼴을 신자들에게 보이고 싶지도 않거니와 더 이상 모욕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노 주교는 그야말로 비장한 표정으로 형사를 노려보다 한마디 하고 말았다.
『나는 못 나가겠소. 대일본 제국에는 종교자유가 있는데 송화경찰서에서 하는 짓은 종교탄압으로밖에 볼 수 없소. 우리 천주교회도 공인된 종교로서 교회 안에서 종교의식을 행할 권리가 있소. 당신 마음대로 하시요. 나는 성당 밖으로 한발도 못나가겠소.』
실뱀같은 눈을 하고 주교의 곡예(?)를 은근히 기대했던 형사도 노 주교의 강경한 반격엔 주춤했던지 물러나 다시 신자들을 모아 미사를 지낼 수 있었다.
수원의 호랑이 신부로 유명하던 심 데시데라또(佛人) 신부와 형사 사이에 있었던 일화 한토막.
우리말 강론에 화가 난 형사가 심 신부에게 조선말 쓰면 안된다는 뜻으로『조선말 나빠요』하고 대들다 심 신부는『일본말 나빠요』하고 응했다. 일본말이 나쁘다니 될 말인가. 당장 경찰서로 불러가 서장 앞에 서게 되었다.
이제 떨어질 독기서린 왜경의 욕설에 한발 앞서 심 신부는 기지를 동원했다.
『저 사람이「조선말 나빠요」한 말을「조선말이 서투르다」는 뜻으로 알고 나는「일본말도 서투르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거요』
오히려 형사는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들은 모자라는 친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모욕. 그것은 고해소 안에 형사를 들여보낸 일이다. 대동아전쟁이 터지고 독이 오를대로 오른 일제는 행여 신부를 통해 무슨 기밀이 새어 나갈까봐「적국 정보 누설 방지」라는 맹랑한 이유를 세워 고해실을 침범한 것이다.
형사를 사이에 두고 신부와 신자는 전대미문의 무언극(無言劇)을 연출한다. 신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 신자는 하나 혹은 둘을 펴기도 하고 셋을 세우면 하나를 펴기도 하는 무언극 그 뜻은 이러하다. 신부의 손가락 하나는 천주십계의 1계를 몇 번 범했느냐는 물음이고 신자의 손가락은 그 수만큼 범했다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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