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네동쎌>(Maurice Nedoncelle)은 현재 「스트라수부르그」대학교수로서 그가 지도 출판한 『호교대전(護敎大全)』은 유명하다.
그는 <뉴먼>( Thon H. Newman 1801~90) 연구를 비롯해서 역사, 철학, 호교학(護敎學)에 관한 저서가 많다.
『인위(人位)와 본성(本性)의 상호성(相互性)『사랑의 한 철학(哲學)을 향해서』같은 것은 그의 독창성(獨創性)을 충분히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는 마지막 저서(著書)를 소개하려 한다.
먼저 우리에게 인상깊은 감영을 주는 것은 미리 짜인 체계(體系)에 대해 사고(思考)가 지상적 독립(至上的 獨立)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가톨릭신부이기 때문에 자신의 종교를 옛모든 비가톨릭 철학체계보다 훨씬 더 위에 놓고 있다. 따라서 그는 <뿔라톤>의 관념론(觀念論)이나 <아리스또뗄레스>의 실제론(實際論)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는 가톨릭이 사랑이나 인위(人位)에 대한 의의를 전적으로 쇄신(刷新)했다고 보고 특히 여기에 가담한다. 따라서 가톨릭의 견해를 옛날 체계안에 들어놓으려는 것은 헛수고이며 옛체계들은 이를 내포(內包)하지도 못하고 이를 발견하지도 못했다고 주장한다. 옛철학에 대한 이러한 해방적(解放的) 태도는 <아리스또뗄레스>나 <뿔라똔>이 우리에게 영원히 가르친 것을 무시하는 태도는 결코 아니다.
<네동쎌>도 옛스승들이 많은 분야에 걸쳐 결정적으로 획득한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가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思考方式)을 우리에게 열어놓았으며 우리는 여기에 투신(投身)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뿔롱텔>과 같이 자기 신앙에서 오는 요구를 잘 명심해가며 <뿔라똔>이나 <뿔로띠노스> 또는 <아리스또뗄레스>를 성 <아오스딩>이나 성 <토마스>와 같이 가톨릭적으로 해명하려고는 하지 않으면서도 가톨릭사상을 위해서 재고(再考)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확신에 의해서 공공연히 움직이고 있으나 분석(分析)에 있어서는 이성적(理性的) 반성만을 하고 있다. 무신론자들도 그의 논리적 연쇠(連釗)에는 놀래고 있다.
<네동쎌>은 위격(位格)과 독창성을 내세우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의 학설을 영적 인격론이라고 부를수도 있다. 그는 위격(位格)을 자연적 여러 조건에만 귀착(歸着)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입증(立證)한다. 우리는 흔히 껍질과 알맹이를 혼동하고 있다. 위격을 동반하는 성질이나 또 이를 지지하는 것들과 위격을 정말 안으로 부터 일으키고 유지하는 중심과 혼동하고 있다. 여기서 여러가지 논리적 오류(誤謬)와 심리학적(心理學的) 오류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전자는 인격본성(本性)에만 맞는 사고(思考)의 결구(結構)를 위격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며 후자는 정신적 인격과 거래(去來)한다고 믿고는 있지만 석상(石像)을 성인(聖人)으로 육신(肉身)을 영혼으로 우연적인 사건을 본질적인 구조로 의식(意識) 속에 알고 있는 이름모를 여러 가치(價値)들을 의식 자체로 알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위격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발견한다. 위격은 다른 위격과 접촉하므로써 그리고 지구적(持久的)인 영적(靈的)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깨어나며 깨어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나』는 또 『너』 위에 작용한다. 이때 『우리』는 『너』와 『나』의결과가 아니라 『너』와 『나』의 원시적(原始的) 덩어리이며 여기서 우리는 『너』와 『나』의 기원(起源)과 위격적인 구별을 찾아내고 있다. 이렇게 각 의식들은 우리가 튼튼한 다리를 놓을래야 놓을 수 없는 점은 섬들과 같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같은 근저(根底)에서 솟아나는 정신들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쉴새없이 성장(成長)하고 분화(分化)되는 유기체(有機體)의 살아있는 단일성(單一性) 안에서가 아니면 진보를 볼 수 없다.
인격(人格)은 우리가 힘껏 싸워서 빼앗아야하는 것이다. 인격은 가리워져 있을 수도 있고 무시될 수도 있으며 분열될 수도 있다. <뿔라똔>과 <헤겔>은 타락을 말하고 있고 가톨릭에서는 원죄(原罪)를 말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자연의 거스림을 제승(制勝)해야하며 정신의 내적분열(內的分裂)을 없이 해야한다. 악(惡)은 어떤 형태를 쓰고 있든지 제거(除去)해야 한다. 인격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장애(障碍)를 부인하는데 있지 않고 이것을 이기고 이용하는 사랑에 있다.
사랑만이 서로 존경하여 구별을 해제(解除)하는 완전한 결합안에 모든 위격을 부합시키고 따라서 상호승진(相互昇進)을 보장한다. 그러나 사랑은 먼저 위로 천주 자신에게 각의식(各意識)을 가져가지 않고서 그저 평면적(平面的)으로만 위격을 둘씩 둘씩 여러가지 방향으로 단결시켜가며 위격들 위에 작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절대에로 달려가는 이것만이 자립(自立)하는 애덕(愛德)이고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천주를 사랑하는 것이고 천주의 사랑은 쉴새없이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로 하여금 타인(他人)을 사랑하고 타인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 또 이 사랑은 우리를 있게하는 동시에 타인들을 있게 한다. 상호성은 우리에게서 그들에게로 왔다 갔다하고 있으며 이는 천주께로부터 우리 각자를 위해서 또 우리 각자간에 있는 상호성을 위해서 천주께로부터 오고 있다. 좀더 나아가서는 천주께로부터 오는 계시(啓示)는 천주도 그의 본성안에 하나의 상호성으로 계시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보면 우리는 직접 천주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천주 자신과 우리가 상통(相通)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런 상호성의 차원(次元)은 절대적 사랑의 차원 그것이니 우리는 이런 무한한 이상을 떠들어대지 말고 지향(志向)하고 살아야 하겠다. 우리들 안에서는 사랑이 위로 던져진다. 우리의 이 사랑이 천주께로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내린 것이란 것을 알기 적엔 이 사랑이 천주에게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정신이 그의 원천(源泉)으로 되돌아가는데는 여러 계급이 있다. 먼저 과학(科學)이 있다. 과학은 자연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지만 그 위에 하나의 실천적인 지배를 하고 있다. 예술(藝術)은 공통하는 하나의 정서(情緖) 속에 의식들을 연합하고 있으나 의식에게 결정적이고 또 고정된 단일성(單一性)은 주지 못한다.
윤리(倫理)는 관대한 마음 즉 선(善)의 실현화를 자아내고 있지만 혼자서는 절대적 사랑을 전제(前提)로 하는 진정한 상호성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스또이씨즘」의 예에서 넉넉히 보고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형이상학(形而上學)』으로 돌아와야 하겠다.
사랑이신 천주만이 본성(本性)과 위격(位格) 사이에 있는 이원론(二元論)을 해고할 수 있으며 특히 정신의 내적 분열을 방지할 수 있다. 천주만이 우리안에 있는 것이나 우리밖에 있는 모든 것을 속량(贖良) 하실 수 있으며 물질을 되돌아오게 하고 정신을 자기와 화해(和懈)시킨다. 불행하게도 의식(意識)이 반역(反逆)을 고집한다면 이것이 바로 가톨릭에서 말하는 지옥(地獄)인데 그때에도 천주께서는 사랑의 태도를 견지(堅持)하고 계실 것이다.
이런 사랑의 태도가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아직도 벌을 내리지 않고 끝까지 참아주시고 권유하시고 계신다. 천주의 사랑과 <네동쎌>의 철학은 이와같이 위격의 문제를 심각하게 놓고 있다. 그의 철학은 우리를 <데까르뜨>나 <라이브닛츠>의 「꼬지또」적 교만한 고독의 오류에서 건져내고 있다.
의식(意識)은 천주나 타인을 거스려 타인들 옆에서나 천주밖에서 자기혼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철학이 우리에게 지워놓은 둘째 오류는 과학의 주제넘은 위세(威勢)이다. 자연만을 소화시킴으로써 위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닌 물질의 지배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너』가 천주인 『너』와 더불어 내밀(內密)하게 상통하는 가운데 승진(昇進)됨이ㅡ로써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오류는 모든 진화론자(進化論者)들이 믿고있듯이 악을 흡수(吸收)하고 인간성을 생명의 완전에 이끌기 위해서는 시간만이 해결한다는 오류이다.
더 나은 미래(未來)로써 지난 과거를 회복할 수는 없는 것이니 과거도 되잡고 흔들어 놓아야겠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생명안에 삽입(揷入)되고 시간의 흐름안에 쉴새없이 현존(現存)하는 영원만이 모든 것을 정화(淨化)할 수 있고 되잡을 수 있으며 구원(救援)할 수 있다.
영적 인격주의는 본질적으로 구원의 철학이다.
黃旼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