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박사가 가라키는 곳은 우폐 우단이었다.
『이런 경우의 재발처럼 경계해야 될 일이 없는데 그는 내 말에 순종하지 않소』
『어쩐 일일까요?』
『사랑이 자기희생이라고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좀 너무 심한 것 같애』
『………?』
『새벽에 전화가 왔댔어요.』
『누구한데서요?』
『누군 누구겠소? 첫새벽에 서울을 떠났다오. 이번에는 설악산으로 간다나…』
유 박사의 눈 속에는 노여움마저 일고 있었다.
『그분은 여행을 좋아하신다죠?』
한 가닥의 기대가 연기처럼 가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미사는 물었다.
그가 서울을 떠났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자기가 느꼈던 가슴의 아픔이 신기할 정도로 선명했다.
『여행이라면 멋이나 있지…』
유 박사는 설합 속에서 한 장의 신문을 꺼내주었다.
한국에서 가장 부수가 많은 일류지다.
미사는 신문을 받아서 이리저리 뒤져보았지만 무엇 때문에 유 박사가 그걸 건네주었는지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광고난을 보아요. 심인광고(尋人廣告)를!』
유 박사는 화가 치밀어 못 참겠다는 눈치다.
주동숙 여사를 찾습니다.
주 여사가 계신 곳을 알려주시는 분에게 후사하겠습니다.
서대문 유내과 원장실내 예관수
전화 ○○○○○번
미사는 광고난에서 눈을 들었다.
주동숙이란 여자가 예관수의 어떤 관계인지 미사는 알고 싶었다.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여자 하나로 일생을 탕진하는 사나이를 내 눈으로 보려니 이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마저 느끼게 되오』
유 박사의 말이 미사의 공동(空洞)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미사의 마음은 이리저리 헤맸다.
주동숙 여사.
그녀는 어떤 여자이며 어째서 그를 떠나갔을까.
「후사(厚謝)를 바라는 속물들이 방방곡곡에서 연락을 할 때마다 그는 천리길이 머다않고 찾아다니는지가 어느새 일 년이나 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설악산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전화가 와서 갔다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또 헛탕일 것을 무엇 때매 첫새벽부터 쫓아가는지. 자기 몸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두고 보시오. 내일 모래면 그는 돌아 올거요. 와서는 또 허허하며 멋적은 웃음을 짓겠지…』
유 박사는 그런 소리도 했다. 모래, 모래면 그는 돌아올까.
그녀는 기다렸다. 이틀 후를.
이틀 후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원장실로 올라가 보았으나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연락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이삼일 내로는 오겠지』
그가 헛탕치고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은 유 박사의 신념인 것 같았다.
2ㆍ3일 이라는 기간이 미사에겐 어지간히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2ㆍ3일만 기다리자. 그 후에는 희망도 있으리라.
미사는 터벅터벅 병원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잠깐만…』
귀에 설은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미사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기를 찾을 사람은 아니겠기에 말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미사의 바로 등 뒤까지 따라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미사는 미심쩍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미사는 그토록 섬찟하는 사나이를 본 적이 없다.
그는 훤칠한 키에 기성복이나마 몸에 잘 맞는 것을 입고 있었다.
이목구비는 젊은 시절에는 배우가 되어도 아깝지 않았을 정도로 짜여져 있었다. 40대 후반의 퇴락한 사나이.
갸름한 얼굴에는 면도자국마저 선명했는데 그녀를 섬찟하게 한 것은 그의 유난히 누런 얼굴빛과 살기 띤 눈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미사씨죠?』
사나이의 음성은 금속성을 띄었고 몹시 위압적이었다. 한미사가 아니라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투다.
『왜 그러시죠?』
자연 미사의 음성도 경계하는 빛을 띄우며 날카로왔다.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요』
『댁은 누구시죠?』
『전 이름 없는 놈입니다. 제가 누구라고 말해도 한미사씬 알 수가 없을테니깐요』
『누구라도 처음엔 이름을 모르죠. 하지만 댁이 저의 이름을 아시고, 하실 말씀이 있다면 의당 댁의 신분과 성함을 밝혀 주시는게 예의며 순서가 아닐까요?』
『우린 예의, 순서, 그런 복잡한 건 모릅니다. 한 가지 뚜렷한 건 내 신분이 수사관은 아니라는 점이며 내 용건은 예관수라는 사나이와 관련이 있다는 한 가지 사실뿐이오』
『네?』
예관수의 이름이 사나이와 입에서 튀어나오자 미사는 아연 긴장했다.
『굳이 신분을 밝힌다면 밝히겠오. 나는 주동숙이라는 여자의 남편 되는 사람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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