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관수가 유박사 환자였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눈치챈 미사는 좀 희안한 기분이었다. 물이 새는 통나무배에 같이 올라탄 사람같기도 하고 어릴적에 헤어진채 만나지 못했던 옛친구를 만나는것 같기도 했다.
『이번 결과에 따라서는 아예 여행을 금지해야 겠어요. 이제는 단념할 때도 되지 않았오. 무어니 무어니해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건 자기 자신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한미사씨?』
유 박사는 예관수에게 향하고 있던 눈길을 미사에게 돌리며 동의를 구했다. 유 박사 말로 미루어 본다면 예관수는 그의 충실한 환자는 못되는 모양이다.
『소중하긴 커녕 투우 머치라 생각되는데요』
미사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것이 본심인 셈이었다. 없어도 좋을것이 있다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오는 그녀이기도 했다.
『이 아가씨 몸보다는 마음쪽 치료가 더 시급한게 아냐?』
유 박사가 과장된 몸짓으로 예관수 쪽으로 몸을돌렸다. 예관수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연방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은 미사에게 대한 동의의 표시인지 유 박사에 대한 것인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한 선생 그럼 가실까요?』
예관수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부수수 일어나자 유 박사는 인터폰으로 몇마디 주고받더니
『곧 내려가세요. 결과는 오후 두시께나 돼야 나온다니 그때까지 함께 차를 하시든지 산책을 하시든지 그건 두 분이 알아서 처리하시고 이따 다시 와주시기 바라오』
두 사람은 원장실을나왔다. 미사는 예관수가 이르는대로 이리 들고 저리 들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던 끝에 마침내「X선실」앞으로 왔다.
『미로(迷路)같은 길을 용케 아시는군요』
『하하하. 모두가 컬럼버스의 달걀이지요. 익숙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도 모를때는 어마어마해 보이는 법입니다』예관수는 문을열고 미사를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곳에는 이미 몇명의 환자들이 순번을 기다리고있었다. 비단 결핵환자만이 아닌성 싶었다.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삼면이 막힌 방구조 때문인지 흡사 유배지(流配地)에 실려가는 선실(船室)에 앉아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러자 퍼뜩 이민을 떠난 가족들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들은 남들처럼 떠나고 싶어서 떠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마치 유배지로 실려가는 심정이었으리라.
그때 아버지 한장군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주기를 바랐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사도 몇번이고 자살을 생각했지만 결국 그러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언제라도 죽을수 있도록 치사량이 넘는 수면제를 언제나 가지고 다닌다.
그것은 마치 미사의 호신(護身)을 위한 마스코트와도 같이 그녀의 핸드빽 깊숙히 숨어있다.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미사에게는 안정이 온다.
『아까는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미사의 기분을 돋구어 주려는 듯이 예관수는 말했다.
제 생각에 빠져있던 미사는 언뜻 제정신으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네?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희귀한 용기를 가지신 분이라고 감탄했지요. 세상을 살자면 자신을 보람있는 존재라고 느끼더라도 고달픈게 아니겠어요. 항차 인생 자체를 잉여(剩餘)과잉, 하잘것 없는것, 쓸데없는 것이라고 판정하면서 살아갈수 있는 용기말이에요』
미사는 대답을 하지않았다. 그런 소리는 여러번 들어왔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누추한 주름살을 감추려고 덕지덕지 분이라도 바르란 말인가.
내던져졌으니 어쩔수없이 사는것뿐이다. 용기니 뭐니 할 이유조차 없다.
『한 선생님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참 아름다운 음색이라고 느꼈어요. 그 아름다운 언어속에서 한가지의 옥의 티처럼 내 귀에 거슬리는게 있었습니다. 그 말속에 끼어든 한마디의 영어. 그것 때문이었어요』
미사는 무언지 섬찟 놀라운 생각이들면서 그를 맞쳐다 보았다.
『부탁하고 싶은건 그 점이었어요 우리말을 깨끗하게 보전해 주세요. 나는 늘 생각해요. 가령 꽃이라는 단어말입니다. 영어로는 플라워 불어로는 플르르 일본어로는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느것을 들어도 우리 비위에는 꼭 들어맞질 않는단 말입니다. 하지만「꽃」이라고 발음해 보세요. 그럴듯하지 않아요? 깨끗한 캔버스에 깨끗한 피 한 방울이 꼭 찍힌 것을 보는것과도 같이 선명하지 않습니까?』
미사는「꽃」하고 입속으로 발음해 보았다.
그가 지적한 대로 새하얀 캔버스를 생각했고 선명한 핏자국을 생각했다.
『모국어를 사랑하는 여인이 돼주시겠다고 약속하겠습니까?』
미사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관수는 만족한듯이 빙그레 웃었다.
X선 기사가 미사와 예관수의 이름을 동시에 불렀다.
『먼저 찍으십시요. 자 그손에 든 것은 모두 이리 주시고…』
미사는 핸드빽과 코오트를 그에게 맡기고 랜트겐을 찍기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