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메겐 典禮會議(전례회의) (끝) 연설전문
지역의 전통문화 살리고 전례 본정신 옳게 육성
발행일1960-01-10 [제211호, 3면]
(맺음)
그러나 전례의 모국어화를 활발히 주장하면서 미국을 여행하는 「다운사이드」수도원의 「베네딕트」수사 「돔 그리고리 머레이」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의 테-제는 이렇습니다.
A, 20세기에 있어서 모국어의정단한 이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그레고리오」성인이 17세기에 「로마」에서 한 일을 주장하는 것이다.
B, 오 주께서 현묘(玄妙)한 미사의 제사를 제정하실 때 그 어른께서 종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다.
C, 「그레고리오」성인이 라틴어로 그리시아를 대치한 것은 라틴어가 민중의 언어이었기 때문이었다. 「불가다」성경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 성경이 민중이 말하던 언어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D, 성 「그레고리오」의 시대에 어느 미사나 사적(私的)으로 염하지 아니하였다. 이제는 사람들이 진행되는 것을 알지마는 이해를 못한다. 민중은 침묵하도록 격하(格下) 되었다.
E, 「돔머-레이」는 「민중의 미사」의 이념을 간단하고 얼른 알 수 있는 스타일로 진전시켰다. 그는 사람들에게 「겔리뉴」의 성영의 영역(英譯)을 노래하도록 가르친다. 성영은 우리 시(詩)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부 양론이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며 성좌가 모국어의 방면에 신중히 움직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 생각에는 만일 성좌가 모국어를 보다 많이 사용하기릘 허락 아니하였다면 미사의 현구성(現構成)을 방해할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훈」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읽는데 일반적으로 동의(同意)가 보입니다. 그 합법성이 성좌에서 승인되어 서간과 복음 양편을 라틴어로 읽은 다음에 모국어로 읽는 또 심지어 어떠한 경우에는 중첩(重疊)을 피하여 「교훈」을 모국어로 직접 읽는 허가가 내렸읍니다. (성주간에-이 허가는 「아가라」와 「도이취」에 내렸읍니다.) 성좌의 특별 허가로 독일어가 금년 성주간에 전 도이취의 각 구교에서 「수난」과 「예언」낭독에 사용되었읍니다. 이 특허는 금년에 제한되었고 실험으로 보고있읍니다. 그 영향을 받은 예절은 성지주일 그에 따르는 화요일과 수요일 수난 본날과 토요일의 부활전야이었읍니다. 도이취인들은 그 특허를 열성으로 받어드리었고 나중에는 일상 실천으로 채용되어 전 세계에 신장되리라고 믿고 있읍니다. 그것은 「콜론」대주교 「후링」추기경의 신청에 응하여 허가되어 예부성성이 포고( 布告)로 반포하였다. 「치코냐니」추기경의 글을 보면 이 허가의 토대가 수난절의 예절에 신자들의 생명있는 참가를 가능케하는데 관련된 사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이 길기 때문에 이제까지 실천해온 방법이-라틴어로 전문을 읽고나서 독일어로 읽는-불현아였읍니다. 인도에 내린 전례허가 중에 1958년 2월 24일 「아가라」교구에 이러한 허가가 있었읍니다. (A) 본당 미사때에 창미사나 보통미사나 자격있는 집전자(執典者)나 봉헌자(奉獻者) 자신이 서간과 복음을 창하거나 낭독하거나 한다음에 동일한 부분을 사람들에게 모국어로 읽어주기. (B) 본당의 창미사때에 「기리에」「글로리아」「크레도」「상투스」「아뉴스데이」를 봉헌자가 라틴어로 창한다음에 모국어로 노래할 수 있음. 즉 「글로리아」와 「크레도」 (E) 성주간의 3일간 「수난」의 장엄창(壯嚴唱)을 제외하고 「교훈」 전부를 모국어로 외울 수 있음.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면 적어도 망부활날의 예언의 낭독을 봉헌자나 집전자가 모국어로 할 수 있음. 그러나 최근에 「아가라」의 대주교가 성주간의 3일간에 관하여 1958년에 내린 허가가 취소되고 성토요일로 국한한다는 취지의 포교성성의 통첩을 받었읍니다. 이 단계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미 제가된 특허가 사실상으로 실천된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신자들의 반응이 어떠하겠느냐 물을 것입니다.
언어를 초월하여 전례를 구성하는 상징과 동작과 기도가 있읍니다. 여러 전례학자들과 선교사들이 이러한 조항들이 각 민족의 특질에 더욱 적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의 팽창 초기에 전례가 「시리아」에서 「그리시아」에서 「로마」에서 서로 다른 형상을 취했던 것처럼 교회의 새로운 선교팽창이 어찌하여 「중국식」으로 「인도식」으로 「아프리카식」을 그 지역의 문화, 전통, 종교적 기질에 완전히 적응하는 전례로 이르지 못하겠읍니까? 근대의 역대 교종들이 동방예절의 변화가 성교회를 풍부케 한다고 거듭 선언하셨읍니다. 「비오 12세」로부터 위에 인용한 원문은 교회가 자체를 적응시키기를 원하고 또 「어떠한 곳에서 발견되었거나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면 전부를 취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갈망은 확실히 합법적입니다.
○ 내적정신
그리하는 동안에 급진적인 변동이 없이 성좌의 인가와 더부러 지역적 관습과 전통에 수많은 적응이 있기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한 조항이 많이 이번대회의 푸로그람에 있으니 이 몇일동안에 성과있는 토론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다 선교에 있어서 전례갱신의중요성을 납득하고 있읍니다. 그러한 갱신을 지향하여 모국어의 제한된 사용과 전례상 약간의 적응이 가치있는 도움이 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外的) 변화로부터 우리가 바라는 갱신이 자동적으로 나오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내적 정신 즉 위대하고 어려운 전례의 정신을 육성(育成)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정신입니다. 즉 우리 신앙의 교훈과 훈련으로써 우리가 지치지 말고 발전시키려고 해야할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찬미와 자기 봉헌의 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