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대철학자요 극작가이며 특히 유신론적 가톨릭 실존주의 철학가인 가브리엘 마르셀이 지난 8일 향년 83세로 영면했다. 이에 본보는 정의와 평화를 존중ㆍ인간실존의 신비를 주장한 그의 철학관 및 인생관을 김형효씨를 통해 알아본다.(편집자 註)…○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현대 프랑스의 가톨릭적인 실존사상가로 샤르트르와는 여러 점에서 반대되는 세계적인 철학자로서 그는 1889년 12월 7일「빠리」에서 태어나서 1973년 10월 8일 이 세상을 갔다. 향년 83세를 그는 누렸다. 필자가 그의 강의를 듣기를 3번, 서양인으로서 보기 드문 단구인 그는 텁수룩한 머리스타일에 시골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또 거기에다 염소수염을 입술 언저리에 가졌던 멋쟁이이기도 하였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68년「브류셀」에서였다. 아마도 지금 생각에 1000여 명 수용할 수 있었던 대강당이었던 것 같았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초만원을 이룬 그때에 TV까지 등장되어 그의 강연이 녹화방송되기도 하였다. 그가 한 강연의 제목은「철학의 개념」이었는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사고의 유희를 즐기는 이론철학이 얼마나 오늘날에 무의미한 것인가를 역설하면서, 그는 철학의 비생활화를 통렬히 반박하였다.
그의 강연이 매우 긴박감을 주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그만 그 강연의 뜻을 모르겠금 되었다. 그런데 그냥 나는 마지막 부문에 가서 그 강연의 내용을 놓치게 되었는데 사실인즉 그의 콧구멍 끝에 콧물이 고여서 카랑카랑한 그의 음성이 목구멍에서 나올 때마다 울려서 흔들흔들 그렸다. 나는 그것이 혹시나 떨어지지 않냐 하는데 신경을 써서 마지막 강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제 이런저런 추억이 떠오름은 그가 작고하였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그때를 회상함에서다.
또 세상 사람들은 흔히 그의 사상을 일컬어 실존주의라 하지만 그는 그 표현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그리스도교적인 소크라테스주의나 또는 신 소크라테스주의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이 점을 존중하여 보면 그의 철학적 바탕은 샤르트르와는 달리 플라톤의 고전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르셀 그의 일생은 철학자로서 극작가로서 인간실존의 생생한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사상가의 생애다. 그는『드라마를 통해서 또 그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사?(思?)가 파악되어지고 또 구체화되어짐을 나는 확신한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드라마적인 형이상학은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숨 쉬는 깊은 밑바닥을 헤쳐간다. 이래서 우리는 그의 사상을 유신론이라 한다.
다른 현대사상과 같이 그의 사상도 역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상황적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상황 속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해석함에서 그는 인간의 실존을 가정이라는 원초적인 상황아래서 연구한다. 그가 만든「가정의 신비」란 표현은 인생과 관계가 없는 진리를 거부하는 철학적 정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래서 그는 철학자가 자기의 사상을 관념적으로 체계화시키는 것에 극한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체계는 늘 소유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데 인간이 진리를 소유함이란 정직하게 보아서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참인간은 진리에 의하여 소유되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에 대한 추상적인 논리를 비웃고, 나의 생명을 바치게 하는 믿음으로서의「진리의 정신」을 드높였다. 구체철학은 진리가 인생과 어떤 형태든 결혼을 할 때에 생긴다. 그런 결혼의 모습이 바로 진리의 육화이다. 물질과 정신이라는데 까르뜨다운 이원론을 거부하고 그는 시인 빼기같이 물질과 정신이 하나로 뭉친「살」을 사랑한다. 살의 철학에 의하면『초자연적인 세계도 살의 세계다』살의 철학은「나의 육체」의 개념으로 번진다. 내가 안으로 느끼는 나의 육체는 내가 단지 소유하고 있는 그런 육체가 아니라, 바로 나의 존재와 같다. 나의 육체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자연히 감각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를 낳지 않을 수 없다. 기억이 나의 내면적 실존의 확실성을 증언하듯이 감각은 바깥세계의 존재론적 확실성을 증언한다. 느낀다는 것은 세계에로 나를 열어놓음이다.
죽음이 존재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느낌의 사라짐이라기보다 오히려 느낌의 변형이라고 보아야 한다.
죽음이 느낌의 변형으로 보는 그의 신비주의는 자연히 문제와 신비와를 구별치 않을 수 없다. 문제의 세계는 대상의 세계, 논리의 세계, 정의가능의 세계, 한정된 세계다. 그래서 문제는 언제나 정확하다. 그러나 신비가 나타나는 세계는 정확한 논리는 아니지만 확실한 체험의 질서다. 사람은 논리가 아니고 체험이다. 그런 체험은 실존적인 가치가 살아 움직인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의식은 그대를 가치 있는 실존으로 마중하는 의식이다. 마중하는 마음은 믿는 마음이 없이 어찌 생기겠는가! 신비를 대상화하면 수수께기로 타락된다. 그러나 참신비는 정신과 생명이 가장 친밀하게 공생하는 가치 자체다.
인간은 편력하는 존재요, 나그네다. 편력하는 존재는 스스로 지쳐서 절망하거나 굳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참 희망의 싹이 튼다.
절망을 깨닫지 못한 자가 희망을 맛보지 못한다. 희망은 자기존재와 자기와의 신비스런 우정과도 같다.『누가 우리 자신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우리에게 있겠는가?』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었다. 사실이다. 자기와의 우정은 마르셀의 윤리학의 주요과제다. 이기주의는 자기를 참되게 사랑하는 길이 아니다.「깨어진 세계」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은「높으신 그대」로서의 하느님과 이웃들과 같이 삶이다. 주체적인 것은 상호주체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기에 나에게 성실함은 이웃과 하느님에게 성실함과 같다.「존재는 성실의 장소」라고 그는 묘사한다.「한 존재를 사랑한다고 고백함은 그대는 죽지않으리라고 말함이요」자기를 사랑한다함은 나의 존재도 죽지 않으리라고 말함이다. 자기를 죽임은 곧 절망이다. 모든 절망의 의식은 그 밑바닥에 자기비하의 의식을 갖고 있다. 현대문명의 반종교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만족이 아니면 자기 불만을 노정시킨다. 자기불만은 자기파괴를 재촉한다.「우리 세계의 본질은 인간을 반역케 한다」종말론의 역사의식이 여기서 뚜렷해진다. 소유에서의 승리자는 거만하고 패배자는 쓰레기신세로 전락한다. 그 승리자는 쾌락과 권태의 반복으로 그 패배자는 저주와 욕지거리로서 자살(정신적)한다. 존재의 승지라는 적을 만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평화다.「거부에서 기구에로」인간을 부름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에서 맛보도록 하는 인간의 착한마음을 전제한다. 그의 철학은 인간의 마음을 믿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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