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숙수끝에 맞이하는 아침은 투명하리만치 상쾌했다.
오랜 동면 끝에 봄을 맞이하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미사는 눈을 감은 채 이 새로운 아침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몸속에 박혀있는 독소들이 간밤의 폭풍우같은 눈물로 말끔히 씻기워 갔나보다.
가슴속에는 휑한 공동이 뚫어있기는 했지만 그 구멍은 먼 나라로 통한 바다의 해풍 냄새를 실어오는 것 같다.
그 구멍 너머로 맑게 개인 가을하늘이 보이기도 한다.
눈을 떴을 때 눈까풀은 상금, 빽빽했으나 어쩌면 이리도 감미로운 적막함일까.
그리고 이제 미사에게는 기대가 생겨있었다.
열시에는 유내과로 가서 그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가…
잔잔하면서도 즐거운 기대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된장국 냄새가 그리웠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손수 끓여주시던 된장국.
콩을 사다가 메주를 쑤어야지. 메주가 뜬 다음엔 간장을 뜨고 된장을 담가야지…그리고 아침에는 된장국을 끊여서 먹어야지…
어쩌면 이리도 조촐한 기대…
미사는 어쩐지 눈물 겨웠다. 간장을 뜨고 된장을 담구리라는 하찮은 소망이나마 자기 속에 싹터있다는 이 아침의 변환이 스스로 눈부셨다.
이 기분을 누구에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었다.
털어놓음으로써 축복받고 싶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 젖었다.
투명한 초겨울 햇살을 기대했건만 하늘은 우중충하게 흐려 있었다.
으스스하게 추운 날이다.
아파트 광장에는 분수도 멎고 나무들은 모두 앙상한 가지를 뻗치고 있다.
분수가에 놓인 벤치가 스산해보였다. 지금은 저곳에 앉은 사람도 없다.
미사는 눈길을 추켜들며 먼 하늘께로 향했다.
하늘이 치솟는 아파트 건물에 의해 짓찢기고 있다.
미사는 오늘따라 13층 자기의 아파트방에서 무언지 비인간적 요소를 찾아내고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랐지만 편리한 감옥을 연상했던 것이다.
뜰이 있는 집을 가졌으면…조그만 집을 비둘기장 같이 조그만 집을 그리고 뜰을 가졌으면…흙이 있는 조그만 뜰에다 채송화랑 봉숭아랑 깨꽃 분꽃 따위를 씨 뿌려서 꽃을 피워 보았으면…
미사는 즐거웠다.
이제 조촐한 소망들이 봄맞이 하는 땅속의 씨처럼 움을 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전 열시 20분 전에 미사는 이미 유내과에 도착했다.
아무리 시간을 맞춰서 오려 해도 마음이 급해서 20분씩이나 일찍 와버렸다.
미사는 병원 정원 앞에서 예관수를 기다렸다.
그를 만나서 같이 유박사에게로 가기로 어제 약속했던 것이다.
병원은 서서히 분주하게 시작한다. 입구문이 쉴새 없이 여닫긴다.
진찰권을 사는 환자의 열이 점점 길어진다. 열시가 되었으나 그는 나타나질 않는다. 조금 늦는 모양이다. 요즘엔 교통사정이 나쁘니 늦을 수도 있으리라.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도 예관수는 나타나지 않는다.
미사는 풀이 죽었다. 몹시 기다렸던 만큼 허전함이 더했다.
그러나 그는 늦어도 꼭 올 것만 같다. 결코 안 올 사람은 아닐 것만 같아서 또 30분을 기다렸고 두 시간을 기다렸다.
다리가 뻑뻑했고 유리문 너머를 너무 오랫동안 쏘아온 탓으로 눈동자도 얼얼하며 아팠다.
그녀는 맥없는 유 박사에게로 올라갔다.
『태사장이 호들갑을 떨 만큼 미사씨 상태는 나쁘지가 않아요. 이것 보십시요.』
미사는 유 박사가 가리키는 렌트겐 사진의 흐미한 부분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이라는 뜻은 아니죠. 우선 일주일에 두번 스트렙토마이신 주사를 맞으시고 하루에 나이드라지드 세 알, 파스 스물 한 개씩 복용토록 하세요. 소화제와 비타민을 첨부해드리겠소. 내 말에만 순종하면 미사씨 회복은 보장해요. 예관수씨처럼 자기 몸을 없수이 여기는 사람에게는 나의 보장이 아무 쓸모가 없지만요』
『예 선생님 상태는 그렇게 나쁜가요?』
『지금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사진을 보여드리는 것은 미사씨 투병을 위한 참고와 충고로 그러는 겁니다』
유 박사는 미사의 사진을 비쳐보던 자리에 예관수의 사진을 끼웠다.
악! 미사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렌트겐을 볼줄 모르는 미사의 눈에도 그의 폐는 벌집쑤셔 놓은 것 같으니 말이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요. 이건 다 아문 자리요. 이걸로 이 사람의 병력(病歷)을 짐작할 수 있지요? 초인적인 투지였어요. 오랜오랜 투병생활이었지요. 기적적으로 나았드랬죠. 그런데 다시 재발이다 그 말이에요. 보시오. 여기 이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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