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세례와 입교
세례는 물로 씻는 예절로서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내적죄의 사함을 뜻하는 성사이다. 이 성사로써 교회의 일원이 되고 다른 성사를 받을 자격을 갖추는 중요하고 일의적인 성사다. 그러나 그리스도 승천 후 성신이 강림하시고 부터는 전세계 어디서든지 죽음에 임박한 유아라 할지라도 구령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불가결한 성사로 되고 있다. 또한 각 본당 사목에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예비자들의 세례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사건들 또 충분히 인식되지 않은 사람들의 개종문제도 일고의 여지가 있어야 하겠다.
교회 유일무이한 구원의 포교활동이 이천년이나 긴 세월을 두고 계속 되고 있으나 아직 초보적 단계에서 진전 못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눈앞에 두고 우리는 복음화 자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문제의 또 다른 면은 만일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이교라 칭한다면 이 이교라는 개념을 결정짓는 요인이 그리스도교를 실제 거부한 것이 아니고 다만 역사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교와 만날 길이 없었다는 것으로 본다면 서구는 물론 전세계 몇 개의 민족이 아직 이교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세계는 이미 이교의 세계가 아니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리스도교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지금 하나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세계사를 가지고 그리스도교나 비그리스도교적 역사는 같은 조건과 같은 상황속에 대화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 아니겠는가.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가르치듯이 같은 그리스도교(Protestant)라면 구태여 개종시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 속하는 역사권 내에 그리스도교가 알려지기 전에 가지는 종교도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로 구원의 초자연적인 은총을 받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정당한 종교라고 왜 못하겠는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이외의 제종교도 초자연적이고 은총을 받을 요소가 스며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교회 가르침의 종교적 논리적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오 제종교 속에 존재하는 다신교적 사상을 받아들이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문제는 구약이나 로마인들에게 보낸 서간 등에서는 그런 타락된 요소를 경계해왔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알고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충실하고 견고한 생활을 영위해온 이교도들의 입교와 구원이 문제다. 확실히 하느님은 모든 인류를 전부 구원하시기를 원하셨고 그러기에 성자를 보내셨다. 교회의 가르침은 성자의 한 방울의 유혈이 전인류를 구속하고 남음이 있다 했다. 만일 우리가 일면 구원을 그리스도교의 고유의 것으로 하고 그리스도교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하고 인간의 초자연적 성화는 인간선의만으로 대신할 수 없고 어떤 모양으로든 지상생활 중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한 면에서는 하느님은 인류구원을 열망하고 있다 한다면 이 두 가지 문제의 합치점을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두 가지의 일치점을 동시에 옳게 보기위해서는 구원의 은총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는 각자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적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과 내적 친교가 있고 그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초자연적 은총에 실제적으로 상관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적인 문제로 현대인 일반은 중대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초자연적 은총에 참여할 수 있는 가치가 없어졌고 주어도 쓸모없는 일이라 한다면 너무나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 은총은 한 개인의 생활에 있어 시간적으로 연속하는 두 개의 시기도 아니고 또 하느님의 초자역적 은총은 극히 적은 수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죄 때문에 허무해지지도 않는다. 또한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는 유한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보다는 월등하게 강력하고 인간은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자기의 기원을 어느 의미에서는 낙관적으로 생각해도 좋다고 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우리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서 최종적인 운명을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후의 말씀은 항상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 우리를 위해서 강생하시고 우리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죄인으로 죽음에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와 그 구원을 인간이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그것을 초월한 하느님의 구원성업이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에 의한 옳은 결단이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이미 실제의 구원 그 자체는 주어졌다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무리 어떤 사람의 행동이 일견 세속적이고 조잡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거기에 은총이 활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실에 있어 어리석은 인간의 주관 때문에 죄가 아닌 것도 죄로 생각되는 것과 객관적인 죄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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