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36년간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크고 작은 무수한 박해를 당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36부터 시작된 신사참배사건이었다.
일제말기 신사참배 강요사건은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신앙양심을 유린당하는 본격적 종교박해였음은 물론 민족적으로 일대 수난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는 다소 의견의 차이는 있다.
그것은 신사참배에 대한 일제의 변명을 그대로 따르자는 급진적 의견과 신사의 본질과 목적을 명백히 규명한 뒤에 태도를 결정하자는 신중론이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신사의 본질을 규명해보면 신사는 신도라는 일본의 고유 종교에 근거하였음을 확실하고 또한 참배는 교회가 금하고 있는 제사의식의 일종임이 확실하므로 신앙양심상 허용될 수 없다고 극력 반대했다.
신사참배의 강요는 먼저 밋션계 학교에 떨어졌다.
그 첫 시도는 1932년 평양에서 춘기 황령제의 제례에 각급 학교의 참석을 요구한데서 시작되었다.
대부분 개신교계 학교였던 평양시내 학교 책임자들은 교리에 위반되는 제례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부하자 당국은 제례직후에 있는 국민의례에만 참석해도 좋다는 것으로 낙착되어 충실전문 및 중학생들과 숭의여고생 일동이 참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선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을 신사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일제는 그 해 여름 전국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명을 내리는 것을 신호로 교회에 대하여도 온갖 회유화 강압으로 악탈한 수단을 동원 1938년 9월 완강하게 반대하는 장로교를 최후로 모든 기독교회를 신사에 절하게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일제는 교회의 특별집회가 있을 때마다 회의 벽두에 반드시 신사참배를 강행시켰으며 불참자를 색출해 내기위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①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②천조대신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③국가가 첫째냐 종교가 첫째냐 등의 질문의 회답을 요구 불응하거나 만족치 못한 답을 하는 자는 검속 투옥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아니라 천황에 대한 일본국민의 국민적 예의이며 충성심의 표시임을 역설하면서 종교자유가 조금도 침해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개신교회들은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개 각지의 학교가 폐교당하고 목사들이 옥고를 겪는 등 끈질긴 저항을 벌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가톨릭은 적어도 표면상으론 그들의 희망을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였음을 엿볼 수 있다. 처음 이 문제가 대두되자 가톨릭은 신사참배가 종교예식이므로 금하는 태도를 보인다. 곧『이왕에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종교적 의식인줄 알고 대문답(문답교리서)에 기재한바와 같이 금지하였더니 그 후 정부의 발표와 설명에 의하면 종교와는 전연 구별이 있어 다만 황실의 어조선을 경앙하며 국민 정신을 작흥케하는 국가의식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신앙은 법률상 자유인만치 만일 신사참배가 종교의 의식과 구별이 없다면 명하지는 아니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교황대사와 주교는 일반교우들에게 이 설명을 알려주어 모든 이가 안심하고 참배하게 되었습니다』하고 경향잡지 1936년 4월호에 공표했던 것이다.
그것은 신사참배에 관한 한국과 일본 주교들의 문의서한을 받은 교황청의 일본정부의「국민의례일뿐」이라는 공식 해답을 받고『종교의식이아니라 국민의례라고 정식성명한 이상 국가의식인 신사참배들 해도 무방하다』는 회신을 일본주재 교황대사를 통해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개신교 교회 사가들은 지금도 매우 유감스러운 표정이다.
즉 감리교회와 천주교회는 별로 강요를 당하지도 않고 도리어 자진해서 신사참배를 허용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장로교회나 기타교파에 참배 강요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신부들은 신사참배 문제로 충돌을 피하는 쪽으로 신경을 썼고 한국인 주교들은 지방교회 순시를 나가면 먼저 그 지방 신사에 가서 참배한 후 성당에 들리곤 했었다.
1943년 11월 황해도일대 순시에 나선 당시 경성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사리원에 도착 그곳 신부들과 신사를 참배하는데 사리원 주임신부가 일본인들이 하듯 손벽을 세 번치는 바람에 마지못해 절을 하던 다른 신부들이 웃음을 참느라 혼이났다.
나중에 절만 해도 될 것을 굳이 손벽까지 치느냐는 물음에『누구는 좋아서 그러는 줄 아나. 그래야만 그자들의 의혹을 안사고 우리 일에 지장이 없을 것을 생각해서 그리한 것 뿐』이라고 대답해 쓴웃음으로 넘기고만 일이 있다.
물론 서양신부들은 해당이 안되니 참배 따위는 안해도 무방했다.
일반신자도 배알이 뒤틀리는데 신부가 신사 앞에서 90도 절을 하자니 속이 편할 리 없다. 그렇다고 안하면 트집에 트집을 잡아 들볶는 판이다.
1936년 5월 피정차 모인 경성교구 신부들도 예의없이 남살실궁에 올라가 참배를 하는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대신 중얼거린 말은『하루빨리 네 나라가 임하시며…』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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