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厚岩(후암)
올해는 본당 짓겠다 회장들이 앞장
발행일1960-01-17 [제212호, 4면]
국방부 앞에서 뻐스를 내렸다. 큼직큼직한 문화주택들이 즐비하게 부호를 자랑하듯 버티고 있는 그 가운데의 한채의 집이 곧 성당이었다. 성당이라고 하면 누구나가 뾰죽한 첨탑과 십자가를 연상하지만 이곳의 성당은 그저 여니 주택에다 성체를 모셔놓고 안의 방들을 넓게 터 놓은 것이었다.
문에 들어서자 어느별장에 온 기분이었다. 본당사무실이 따로 문앞층대 옆에 자리잡고 양쪽으로 사철나무가 우거진 길을 비스듬이 십여미터쯤 올라가면 성모마리아의 동상이 역시 상록수 우거진 사이에 새하얗게 뛰어나보인다. 그 뒷쪽에는 기이한 바위들이 보기좋게 자리잡혀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 오솔길이 통하여 있다.
이 본당의 대지는 980평, 성당 건평은 120평 겉모양은 주택같지만 그대로 그리 비좁은 편은 아니다. 기자가 신부님 방에 들어섰을 때 마침 일과 경문을 잃고 계시다 말고 반갑게 맞이하여주신다.
이 본당의 애로한 첫재 성당이 비좁은 것이라 하며 예수회 원장 길 신부께서 매 주일마다 와서 미사를 지내주시므로 주일엔 세대의 미사가 있으나 교우들이 밖에 서서 미사에 첨례하는 형편이라 한다. 금년내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성당을 세워보겠다고 굳은 결심을 표명하셨다. 그리고 본당 사정의 또 하나 딱한 것은 교우들이 모두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한 것이며 좀 부유층에 속한 교우들은 이사를 자주할 뿐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 큰 성당에 나아가 미사에 첨례한다는 점 등이므로 진지하게 본당 일에 대하여 걱정해주잖는다는 점이라 한다. 그리고 다음 한가지는 본당신부가 자주 갈렸다는 점이 이 본당의 발전을 더디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본당은 1949년 8월에 『예수성심』을 본명으로 하고 약현성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설립되었는데 그동안에 본당신부가 다섯분이나 갈리셨고 본당을 한때는 동자동(東子洞)에 이전하였다가 6.25 동란으로 인하여 거의 파괴되다시피 된 것을 본당 교우들이 성금과 서울교구 주교좌에서의 보조금으로 완전수리하게 되었으며 1954년 6월에는 해방동(解放洞) 본당을 분활하는 발전을 보았으며 1955년 6월에 당시의 본당신부 방 레오(方有龍) 신부께서 그전에 천주교양로원(養老院)이던 현재의 이자리로 성당을 옮기셨다는 것이다. (양로원은 지금 소사(素砂)로 이전되어있음)
지금 계신 윤 바오로(尹炳熙) 신부님께서는 로마에서 다년간 연구를 거듭하시어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으신 분으로서 작년(1959) 7월에 부임하셨으니 이런 사정하에 있으므로 이제까지 본당을 새로 짓지 못한 것이다.
현재 이 본당에는 다섯 푸레시디움이 있으며 그중의 세 푸레시디움이 『소년 푸레시디움』이라 한다.
교구내엔 여섯동회밖에 없으나 교우수는 무려 1800명이며 평신도사도직으로는 『푸레시디움』외에 『성모성심부녀회』가 있으며 또 『분도회 자선병원』에 계시는 라우디스 수녀께서 많은 예비자를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것이다. (윤신부께서는 매주일마다 명동에서 지성인들을 위한 교리강좌를 담당하시고 계심)
또 이 본당에는 열심한 회장들이 많이 계셔서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나 그중에서도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 교수로 계신 이 바오로(李順石)씨는 총회장으로서 본당 설립당시부터 이제까지 헌신하여 왔다는 말씀을 듣고 하고 싶은 말씀을 물었다.
『옛날부터 우리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뭐 그리 걱정은 없습니다. 오직 그 가난한 교우들의 열성으로 금년에는 꼭 본당을 지을 결심입니다. 이미 설계도까지 다 되었읍니다』라고 역시 본당신부님과 똑같은 말을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