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부인전교협조회 소속으로 한국에 나온지 한달이 채 못되는 「마리아 하이센베르그」양을 대구시 효성여자대학 기숙사 사감실로 보이는 일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인전교회 이야기를 들어볼 참인데 제발 신문기자가 찾아왔다고 생각지 말고 후리 토킹을 좀 해봅시다』그는 근엄한 자세를 풀면서 맑게 개인 바깥하늘을 높이 바라보면서 어쩌면 한국의 하늘빛갈은 저렇게 고우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1953년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한창인때 「비엔나」에 있는 「부인전교회」에 입회하여 소정 3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회원자격을 얻어 잠시 전교실무의 경험까지 샇고서 항상 동경하던 이곳 한국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부인전교협조회에 관해서 언제 세워졌고 또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부터…
⊙…이 회가 선 것은 전후(1945년) 오지리에서 전상자가 많이 나고 특히 신부들 전사자로 인하여 교회활동에 적지 않은 지장을 초래하든 때였읍니다. 그때 「비엔나」의 저명한 부인지도자 「힐드갈트 홀짜」여사(哲學搏士)가 바로 이 회릘 조직하여 현재는 약 3백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읍니다. 우리 회원으로 한국에는 제가 처음입니다.
▲=평신자가 나가서 교회 일을 하는데 좋은 이해(理解)를 받을 수 없었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는지요.
⊙…구라파에서 지금도 그런 곳이 없지 않읍니다만 처음 시작할 때는 찬부반반(贊否半半)이었읍니다. 그래서 조고만한 「오피스」 한채에서 시작했읍니다. 교회활동이 현대와 같이 넓혀짐에 따라 우리 평신자가 해야만할 일은 점점 많아져간다고 생각됩니다. 그때문에 우리 회원은 신학(神學)과 영적 지도를 받은 다음에 실무(實務)에 관한 훈련을 받게됩니다.
평신도로서 교회에서 경영하는 병원, 보육원 또는 사무원으로 할일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후원을 받은 일도 있겠지요.
⊙…가령, 저희들이 공부하는 과정에 「비엔나」 예수회 신부들의 적극적 지도를 받고있읍니다. 그리고 회원들이 구라파 각 처에서 가는 곳마다 적지않은 성과를 걷우고 있읍니다. 이 회가가 창설될 무렵 오지리에서의 사회주의 세력은 급진적으로 팽차아던 때입니다. 이런대에 우리부인회는 각 가정을 방문하고 가능한 자선일을 하는 등 참으로 성직자나 수도자들이 하기에도 벅찬 일을 할 수 있었읍니다. 이런 실적은 곧 많은 이해를 얻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이센베르그」양은 1956년 소정과정을 마치고 오지리 「부르크」본당에서 일하다가 다시 영어, 한국어 및 선교에 관한 공부를 새로하고 약 1년간 「론돈」에서 지내면서 여기서는 저명한 반공(反共) 이론가 「더들스 하이드」씨와 교분을 맺으면서 한국진출의 격려를 받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분들도 수도자와 「순명」을 지키지만 다만 수도자처럼 이를 허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파견된 그곳의 주교의 명령에대로 움직이며 전생활을 통하여 전교사업을 돕게되는 것이다. 효성여자대학에서 교육과 학생디조를 맡게될 그는 우선 3년간 대구대교구에서 일할 것을 구라파에 있는 서 주교께 서약하고서 온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