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作家論(작가론)] 베르나노스 (3) 까르멜 수녀들의 대화(對話)
발행일1960-01-24 [제213호, 3면]
내가 보기에 『베르나노스』의 작품중에서 가장 걸작(桀作)으로 생각되는 그의 최종(最終) 작품인 『까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괴로움을 주제(主題)로 쓴 작품이다. 그 여주인공(女主人公)인 『브랑셔 드 라 포르스(굳센청백(淸白)이라는 뜻)』는 병적(病的)으로 소심(小心)한 소녀(少女)이다. 그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명예(名譽)나 체면(體面)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브랑셔』는 정신이상(精神異常)인 그리스도교(敎徒)로서의 행동을 하게 된다. 그는 그의 약점(弱點)까지도 천주께 바치기 위하여 규칙(規則)이 매우 엄격한 『까르멜』회에 들어간다. 번민(煩悶)을 당할 때마다 느끼는 무서움을 천주께 바친다. 그가 『거룩한 고민의 「브랑셔」수녀〔라고 불리우기를 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수녀원장이 아니계시는 때에 그를 대리(代理)한 『예수강생(降生)의 마리아』수녀가 모든 수녀들로 하여금 순교(殉敎)의 맹서(盟誓)를 표명(表明)하게 하였다. 결국 1689년 불란서 혁명(革命)때의 이야기다. 물론 『브랑셔』수녀도 다같이 순교의 맹서를 하였다. 그러나 혁명군중(革命群衆)의 무리가 함성(喊聲)과 함께 수녀원을 차고 들어왔을 때에 그는 도망(逃亡)쳐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까르멜」회수녀들이 처형(處刑)될 때에 『브랑셔』수녀는 자기 발로 그 형장(刑場)에 나타나 그 단두대(斷頭臺)에서 사라지는 마지막 수녀가 되었다.
모범적(模範的)으로 과장(誇張)과 화려(華麗)한 꾸밈이 없는데 있어서 존경할만한 이 작품의 의의(意)는 처음 『브랑셔』가 수녀를 지망(志望)하여 『까르멜』회 연습수녀(노뷔시아)로 들어올 때에 원장수녀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표현(表現)되어있다. … 『천주께서는 당신의 약점(弱点)을 시험하시고저 합니다…가축(家畜)을 수직하는 목동(牧童)과 같이 단순(單純)하여야 합니다』또 말씀하시기를 『한번 어린아이 시절을 넘어서서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 갈라면 매우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마치 밤이 지나간 뒤에 다시 새벽이 오는 것과 같이 천주께서는 그의 용감한 군사(軍士)나 성인(聖人)들이나 순교자(殉敎者)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뿐 아니라 또한 가난과 괴로움에 욕보는 불쌍한 자들로부터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나는 일부러 여기에 『약자(弱者)『단순(單純)』『어린이』『가난(貧困)『이라는 말들을 인용(引用)하였다. 왜냐하면 이 말들이 『브랑셔』수녀의 모습을 표현하고 또 그리스도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 이 수녀 안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악(惡)의 권세(權勢)와 싸워 이긴 것은 그가 지닌 표면상(表面上)의 약점의 힘을 것이다. 변명(辯明)하지 아니하는 약점, 세상이 존경하고 겁(怯)내는 것과 정반대(正反對)인 약점, 죽기까지 한 예수 그리스도의 약점만이 세상을 구(求)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무기(武器)이다.
천주께서는 흔히 자기의 것을 버려두신다. 이 작품 속의 『브랑셔』수녀는 『베르나노스』가 보는 천주의 침묵시대(沈默時代)에 있어서의 유일(唯一)한 가장 충실한 그리스도교(敎徒)의 태도(態度)를 가진 자로서 등장(登場)된 인물이다. 『아마 천주께서는 「까르멜」회의 깃대(旗)를 가장 불쌍한 자의 손에 맡기시리라…』
어린아이의 마음과 가난의 정신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결합한 피흘리는 수녀, 약점, 괴로움이 세상을 구원(救援)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범(模範)이오 우리의 천주이신 예수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말로오』『싸르트르』『꺄뮤』『지이드』의 금욕사상(禁慾思想)은 가끔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변장(變裝)된 하나의 교만(驕慢)에서 온 것이다. 나는 『어느 시골 본당신부의 일기』가운데서 읽은 다음 구절(句節)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다. 『왜 걱정하느냐 왜 앞일을 미리 판단(判斷) 하느냐 만약 무서우면 아무 부끄러움 없이 「무섭다」고 말할 것 뿐이다. 주(天主)를 우러러보자. 그 거룩한 모습이 나타나 나를 안심(安心)시켜주실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유일(唯一)한 효과(效果)있는 방법인 이태도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적용될 것이라고 본다.
진정(眞正, 한 권세는 스스로 작아지는 겸손한 행동으로서 보다 더 잘 표시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근본적(根本的)인 태도는 이 겸손을 통하여 바라다 보이는 것이다.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천주이신 예수께서 종(奴)의 모양을 가지시기 위하여 스스로 없어졌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가 부자되기 위하여 부자가 가난하여지고 인류(人類)를 구속(求贖)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사람이 되신 세계의 역사(歷史)가 시작된 그 시간부터 이미 교만(驕慢)은 통용(通用)되지 아니하였고 기쁨을 주지 못하였다. 거두나 오늘날에 있어서 『산상(山上)의 수훈(垂訓)』이야말로 그리스도교들을 위한 다시 없는 헌장(憲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음으로 가난한 이는 진복자로다.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양선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땅을 차지할 것임이요. 우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위로함을 받을것임이요. 의덕을 주리고 목말라하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애긍하는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애긍함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조찬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천주를 뵈올 것임이요. 화목한 이는 진복자로다. 저들이 천주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군난을 받는자는 진복자로다. 천국이 저의 것임이니라. (마두복음 5장 3-10절)
이것이 바오로 『베르나노스』가 『까르멜회 수녀들의 대화』라는 작품을 ㅗㅇ하여 우리들에게 말하여주고저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