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 發】바티깐의 당무자는 방금 성청과 「터어키」(土耳其) 정부간에 또다시 외교관계수립에 관한 회담교섭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1923년 「터어키」정부가 수립된 이래 수십년 동안 신문과 정부 및 국회 지도자 사이에서 「바티깐」과의 외교적 제휴를 반복하여 환기(換起)해온 바 있다. 현 교황 <요안> 23세께서는 1935년에서 1944년 사이에 당시 <안젤로 론깔리> 대주교로 한 때 「터어키」주재 교황사절로 계셨다.
현재 「터어키」공화국은 인구 2천6백만인데 그 98%가 「모스렘(回敎)」교도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는 대략 25만으로 그중 가톨릭은 1만8천2백88명에 불과하다.
공화국 수립 직후에는 이 나라와 「바티깐」에 유대를 맺는다는 것은 극단적 세속정책으로 「모스렘」과 그리스도교에 대하던 때였으므로 어려웠던 것이다.
1차대전 후 <케말 아타투르크> 초대대통령은 제16세기때부터 「모스렘」교도의 영도권을 장악해온 군주(술탄)들을 추방하였다. 동대통령은 이런 「모스렘」이나 다른 종교의 세력들을 일소하고 현대적 세속정권을 수립하기에 힘썼다.
1920년 <아타트르크> 대통령은 수상(首相) >이스메트 이노누>에게 명하여 「터어키」최대의 도시 「이스탄불」(舊 콘스탄틴노풀)에서 교황순찰사 <에르네스토 필리피> 대주교와 성좌(聖座)와의 외교관계에 관한 문제를 토의한 바 있었다.
1950년에는 외상(外相) 씨가 「파리」로 가서 당시 프랑스 주재 성청대사였던 <론깔리> 대주교와 만난 일이 있었으며 그때 그의 정부는 「바티깐」과의 외교관계를 맺기위한 최후의 결정을 가졌지만 선거에서의 패배로 어쩔 수 없었음을 말한 바 있다.
그 후계 정부는 <세랄 바야> 대통령으로서 작년에 <요안> 성하를 알현하였으로 반공(反共)을 국시로 하고있는 「터어키」정부가 「바티깐」과 유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회(議會)에서도 논의되고 외상(外相) <푸아드 코프루루>씨는 이미 회담이 진행되고 있음을 정식으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1949년 「이스탄불」의 신문 『쿰후리예트』지는 「바티깐」의 반공태세에 언급하고 『터어키는 진급히 성좌(聖座)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쏘련에 의한 국경(國境) 위협에 선명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신문은 「터어키」정부가 「바티깐」의 국제문제에 대한 성명(聲明)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라고 하였다.
1957년 『탄』지는 정부는 1대표를 「바티깐」에 파견하라고 강조하였다. 이 신문은 『터어키 정부가 바티깐의 승인을 받음으로 터어키는 서방(西方) 세게예 대하여 이미 종교를 국가에서 관장(管掌)하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터어키」공화국 수립 이래 법률로서 종교를 제한할 적마다 역대 교황은 외교관계를 1세기를 두고 원해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성청과 「모스렘」국가간에 적대(敵對)관계를 가진적도 있었다. 1572년 <비오>5세는 연합함대를 이룩하고 「터어키」에 대하여 십자군을 일으킨 일도 있으며 그 결과는 「터어키」가 유럽에 큰 세력을 잡게 하였다. 「터어키」의 국력이 약해짐으로 비로소 「바티깐」과의 관계는 개선되기도 하였다. 1839년 <술판 마훔드> 2세는 <리차드 파샤>를 교황 <그레고리오>16세에게 파견하고 「옷트만」제국과의 친선을 강조하였다. 1846년에는 <비오> 9세의 교황 당선을 축하하였고 1848년에는 당시 「터어키」수도(首都) 「콘스탄틴노풀」에 파견된 성청공사를 황실예우(皇室豫遇)로 영접하였다. 50년전인 1909년 7월 5일 <모하메트> 5세에 의하여 그의 영토 안에 거주하는 가톨릭신자를 보호아겠다는 특별사절이 <비오> 10세에게 파견되었다. 그 당시 성지(聖地)를 포함하는 「옷트만」제국 내의 「유럽」인 「아시아」인의 수는 약 75만이었다.
1차대전중 <모하메드> 5세와 성청은 서로 협력하여 전쟁포로를 도왔다.
<요안> 성하께서는 「터어키」 주재 사절로 있는 동안 특별한 존경을 모았으며 「터어키」어로 기도하고 「터어키」말로 복음성경을 읽도록 명령한 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