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 오르는 오열 속에 몸을 온통 내맡긴 미사는 미친 여자처럼 외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방랑을 꿈꾸던 소년이 먼 바다에 떠있던 배를 갈구하다가 갑자기 어느 날 예고도 없는 풍랑을 만나 산산조각이 난 뱃조각을 발견했을 때의 설움을 아시나요?』
『알고 말고요. 압니다. 알아요』
예관수의 부드러운 동의는 쓰라린 상처를 어루만지는 묘약처럼 위안이 되었다.
『만주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는 한 청년이 꿈 많은 소녀에게 가르쳤어요. 그곳의 웅장한 일몰, 잔인한 풍요, 시정어린 황량을요. 소녀에게 있어 그 청년은 모든 것이었어요. 그는 광대한 지평선이었으며 끝없는 광야를 휘몰아치는 눈보라였으며 송화강의 얼음장을 녹이는 봄바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미사의 말문은 또 다시 치받치는 오열로 막혔다.
『미사씨, 압니다. 나는 죄다 알고 있어요』
미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문득 울음을 그치며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마주 앉아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압니다』
『제 사건을 아신단 말씀인가요?』
『미사씨의 사건이 아니라 이성근씨를 알고 있습니다』
『어머!』
불길 같은 부끄러움이 그녀의 몸을 태우는 것 같이 아팠다.
그녀는 떨리는 손끝으로 술을 따랐다.
『안됩니다. 이젠.』
예관수는 그녀의 팔목을 움켜잡고 그녀의 손에서 술병과 술잔을 빼앗아버렸다.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습니다. 비단 미사씨만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언제부터 아셨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신문기자 출신이 아닙니까? 유 박사의 입으로 미사씨가 한 장군의 따님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요. 미사씨 이름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구요. 이성근씨는 그렇게 죽었지만 그는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을 뿐이에요. 그 친구의 순정을 의심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명목을 빌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런데 우연한 일로 미사씨를 만나게 되니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요. 내 머리 속에는 어쩐지 이성근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고 그 이름자 그늘에 가리워 있는 조그만 여인의 이름이 항상 잊혀지지가 않더군요. 그의 법정진술을 듣고 그를 사랑하던 소녀가 까무라쳤다는 신문기사가 어쩐지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살아있었습니다.』
『그런 것까지 기억하시는군요. 그 사람이 그때 한 말을 아시겠네요, 그럼. 단 한 번도 여자라는 것들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어요. 그의 입에서 말이에요. 제가 저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건 그의 입에서 말이에요. 제가 어떻게 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
미사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술을 찾았으나 술은 이미 없었다.
『미사씨. 우리는 인간의 선의를 믿어야 됩니다. 이즘의 노예들은 이따금씩 속에도 없는 말을 지껄일 필요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성근의 죽음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남긴 그의 말이 미사씨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용서를 빌었다 해서 그것이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에요?』
『있습니다. 있구말구요. 이성근씨를 믿으십시다. 나는 그가 미사씨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진실로서 받아들이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성근씨를 통한 미사씨의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합시다. 어쨌거나 미사씨 마음에 사랑의 힘을 일깨워준 것은 그가 아니었습니까. 사랑의 능력을준 존재에게 감사합니다.』
어쩌면 저렇게 달콤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의 말투의 진지성에 눌려 반박은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하여 어찌 이성근을 용서할 수 있으랴.
그러나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몇 년 만의 일인가.
후련했다.
후련하면서도 슬픔은 밑바닥을 모르는 샘물처럼 고여오른다.
이미 밤이 되어 그들은 자리를 떠야했으나 미사의 울음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는 통곡하는 여자를 부축하여 기나긴 방파제를 땀흘리며 걸어갔다.
별이 총총하게 이맛전까지 내려와 반짝이고 있었다.
미사는 사나이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니 그리움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또 하나의 새로운 슬픔이 몸을 휩싸는 것 같았다.
그들은 울퉁불퉁한 공사중인 방파제에 발이 걸려 같이 쓰러지기도 했다.
『저는 여기서 안 가겠어요. 절 혼자 남겨두고 가셔도 좋아요.』
그녀는 주정 비슷한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예관수는 몹시 땀을 흘리고 있었으나 종내 짜증 섞인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큰길까지 나와 버스에 그녀를 올려 태웠다.
서울로 오는 길에도 미사는 줄곧 울었다.
이제는 아예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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