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는 언뜻 시계를 보았다.
한시 반에 만나기로 한 약속이 너덧 시간 이상이나 지연돼 버렸다는 걸, 그제 서야 알았다.
그 자리에 그렇게 버티고 앉아있었다는 건 고사하고 약속 그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런 불찰이 어디 있으며 이런 방약무도를 그는 무어라고 나무랄까…이미 여섯시가 가까운 지금까지 그럼 저 사람은 줄곧 나를 기다렸거나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란 말인가…
『혹시 여기 여자 손님 한분 안 오셨습니까?』
틀림없는 예관수 목소리에 여주인의 반색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린다.
『아이구 이제야 오시는군요. 얼마나 기다리셨다구요. 아씨가 지금쯤은 기다림에 지치셨을 거예요.』
『앗하! 이거 정말 죄송하군요. 진작 온다는 것이 그만…』
장난기어린 예관수의 목소리와 동시에 장짓문이 드륵 열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미사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뒤돌아볼 용기조차 없었다.
탁자위에 고개를 떨군 채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그런 모양은 사정을 모르는 안주인에게는 사나이를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토라진 여자의 모습으로 비쳤던겐지 모른다.
『아씨를 저렇게 기다리게 해놓으시고 어쩜 지금서야 오십니까. 어서 들어가세요』
『글쎄말입니다. 너무 늦었나 보죠?』
여유 있는 목소리로 안주인에게 말하며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와 미사의 맞은편으로 돌아가다 말고
『여어 지금 막 해가 떨어지는 길이군요』
서쪽으로 트인 창 너머로 눈길을 던지며 즐거운 듯이 소리쳤다.
지금까지 사람을 찾아 이리저리 쏘다니다온 사람 같지 않았다.
안주인의 짐작대로 그는 마치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본 일몰(日沒)중에는 뭐니뭐니 해도 튀니지였어요. 바다처럼 퍼진 사막에 떨어지는 낙조의 광경은…』
그는 잠시 기억 속에 살아있는 과거의 한순간을 더듬는 눈길이 되더니 이내 현실로 돌아오며
『한 선생도 언젠가는 한번 꼭 보실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엄청난 자연 앞에서야 인간은 비로소 어떤 예지에 눈뜨게 마련인가 봅니다.』
그는 탁자를 사이에 놓고 미사와 마주 않아있었다. 탁자에 놓인 빈 소주병과 미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좀 놀라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약속시간을 어기는 인간을 왜 여기까지 찾아오셨어요?』
자기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쉰 목소리로 미사는 말했다.
『하하하 여기 이렇게 건재하신 줄 알았다면 문제가 없었겠는데 나는 꼭 한 선생이 미아가 되신 거만 같았지요』
『그럼 선생님은 제가 미아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군요. 제가 귀소 능력을 가진 미아였다는걸 모르셨나 보죠』
술기운 탓일가 웬일인지 그 앞에서 진탕 넉두리라도 퍼대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일었다.
『하기야 그런 의미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미아 의식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유 박사 처방이 내리기 전이라 하여 이렇게 독한 술까지 들이킬 것 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어때요 내말이 응? 하고 묻는 듯한 그의 부드러운 눈길과 마주치자 미사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과거와 현재의 뒤범벅 속에 깊숙히 빠져있는 자신이 숨막혀 졌다.
『선생님!』
그녀는 광란 직전의 여자처럼 그를 부르며 술기운으루 후끈해진 상반신을 탁자 앞으로 내어밀면서 부르짖었다.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제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 폐수같은 넉두리를요! 제가 왜 약속마저 어기며 술을 마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세요? 네? 그 이유를 듣고 싶지 않으세요? 그걸 쏟아놓고 싶어요 그걸 쏟아 놓으면 시원해질까요?』
예관수의 눈길은 차분하게 미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런 기분이 된다는게 신기하네요. 정말 신기할 지경이에요. 감사하고 싶어요. 저는 친구 하나 없이 살아왔거든요. 제 친구가 술이었어요. 저는 술처럼 친한게 없어요. 술이 제일이었어요.』
두서없이 주워섬기는 미사를 지켜보던 눈 속이 갑자기 벌겋게 출혈되면서 어른어른 물기가 번져 올랐다.
그러자 그것은 마치 미사의 눈물을 위한 촉진수(促進水)의 역할을 할 것 같았다.
예관수 눈 속에 번져오른 붉은 기운은 미사의 내부에서 오래오래 닫쳐있던 수문(水門)을 열게 했다.
동시에 미사의 가슴 제일 밑바닥에 뭉쳐있던 폐수줄기는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를 꿰뚫어 목줄기를 부풀리면서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왔다.
북바쳐오르는 오열을 터뜨리며 미사는 속수무책이었다.
고여올라 넘쳐나는 오열 속에 그녀는 부끄러움 없이 몸을 맡겼다.
자기의 어느 부분에 이렇듯이 엄청난 눈물이 고여 있었을까 의심스러울만치 오열은 멈출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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