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로서 하느님을 모실 성당을 짓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보람있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관헌의 눈길을 피해 전전긍긍 이산 저산으로 피해다니는 운명이었음으로 어디처럼 버젓이 내놓고 성당을 짓는 즐거움을 누른채 오랜세월을 보내고야 제대로 성당을 세울수 있었다.
서울의 명물로 세살난 어린애도 아는 명동대성당만 해도 이런 세월이 끝난후에 억눌림의 분화구처럼 솟았고 1893년 세워진 첫뾰죽당 약현성당을 가리켜 어떤 이는 「승리의 십자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박해가 걷힌후 이곳 저곳에 세워진 성당의 위치를 보면 교회사나 박해와 관련된 곳이 많다.
어떤 곳은 순교자 처형지에 어떤 곳은 천주학쟁이를 못살게 굴던 대신의 별장터에 짓는가 하면 천민 대접에 눈물을 삼키다 여봐란듯이 대갓집 흉내를 내어 지은 성당도 있다.
1903년에 지은 충북 장호원성당은 역사가 오래기로 유명하다.
이 성당터는 원래 민비(閔妃) 오라버니인 민응식(閔應植)의 별장터였다
1896년 초대 본당 신부로 이곳에온 불란서인 임 까밀로(R.P.Camilus Bouillion) 신부는 그곳에다 성당을 짓고 싶었다.
임 신부는 어느날 밤 몰래 별장 뒷산 꼭대기에 「영적패」를 묻고 이 터에 성당하나 짓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얼마후 민씨 가문이 망하고 땅을 팔아 치울때 산을 통털어 사고 1백여칸짜리 집도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그곳에다 쉽게 성당을 지울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1890년에 세운 경기도 왕림성당은 영락없는 대갓집 모양을 낸 성당으로 그 역사와 함께 유명하다.
초대 주임 불란서인 안ㆍ안드레아(Eduade Taque) 신부가 세운 이 성당은 성당을 중심으로 대문 행랑채 안채가 규모있게 들어앉아 얼핏 낙향한 어느 대신 시골집을 연상케하는 모습이다.
「천주학쟁이」의 한맺힌 설움을 솟을 대문의 날아갈듯한 용마루에 실어 날려 보내기나 하듯이.
성당짓는 얘기라면 뭐니뭐니 해도 명동대성당이 풍부한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1892년 8월5일 정초식을 올린 이 성당은 당시 기술이나 건축재료 사정으로 봐 워낙 벅찬 공사인데다 착공 2년만인 1894년 동학난으로 청일전쟁이 터져 6년만인 1898년 6월29일에야 준공을 보았다.
당시 이런 건축을 본 일 없는 한국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연일 높아만가는 종각을 올려다 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어떤 구경꾼은 대들보는 얹을줄 모르고 벽만 쌓아가는 기이한 집을 보다 그로선 참으로 중대한 사실을 발견이나 한듯 옆사람의 어깨르 치며 말한다.
『저 사람들이 필경 집을 너무 크게 시작해놓고 들보를 얹을수 없으니까 벽만 자꾸 쌓는걸세』
이런 역사적인 성당들은 잘해야 1년에 한두곳 서는데 비해 1920년을 전후해 전국 각처에선 경쟁이나 하듯 공소가 세워졌다.
1920년 이후 10년 주기로 공소주에 관한 통계를 보면 1920년 1쳔50개소였던 것이 1930년에 와서는 1천3백33개소로 25% 증가했고 1940년에는 1천6백80개소로 20년간 6백30개소가 늘어나는 왕성한 건축을 보이고 있다.
물론 늘어난 숫자만큼 공소건물이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숫자의 공소건물이 세워진것 만은 사실이다.
이때 관보인 「경향잡지」에 나타난것만 봐도 평균 한 달에 한 개 꼴로 낙성기사가 실려있다.
이 가운데는 신자 5명이 주동이 되어 1원에서 20원씩 2백원을 거두어 지은 일곱칸짜리 공소가 있는가 하면 평남 중화읍 공소회장 전베드로는 자기집 대청에서 보던 공소가 신자가 늘어 비좁게되자 쾌히 자기 돈 1백50원을 들여 일곱칸짜리 공소를 새로 지어 교회에 바치기도 했다.
1930년 경남 함천의 李말다 라는 여인은 7년간 열심히 전교했지만 단 한사람밖에 영세시키지 못했다.
아쉬운 대로 방이라도 한 칸 따로 있으면 좋겠는데 사는게 어려워 마음대로 안돼 안타깝던 중 이(李) 여인의 정성에 감복한 같은 고을 강세현이란 미신자가 대지수 백평과 3백원의 건축비를 희사, 공소를 마련했준 미담도 있다.
옛부터 한국 신자들은 성당을 짓는다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와 제 집 짓듯 온갖 정성을 기울였던 아름다운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들은 이재(理財)에는 큰 재주가 없어서인지 몰라도 개신교 신자들처럼 두 서넛이서 성당 하나 거뜬히 짓는 예는 드물고 몇해를 벼르고 별러 힘겹게 대부분 성당을 짓고있다.
그것도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끼리. 한때 구호품이 본당으로 쏟아져 나올때 잠시 마음만 고쳐 먹으면 쉽게 성당을 지을수 있었다.
1950년대 이렇게 해서 세워진 성당이 많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