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의 개척지를 찾아서] 金海(김해)
氏族(씨족)세력이 강한 곳
예배당이 6개처나
예수 믿을바렌 성당에 가겠다는 好評(호평)
발행일1960-02-07 [제215호, 4면]
『본인의 적은 힘이나마 힘껏 여러분들의 손발이 되어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본당으로서 첫 출발을 하는 날 이 본당의 제1대 주임사제(司祭)로 온 <알로이시오> 김(金兌浩) 신부는 그를 맞이한 신자들 앞에서 위와같은 포부와 결의가 엿보이는 간단한 인사를 하였다.
낙동강(낙의 적은 힘이나마 힘껏 여러분들의 손발이 되어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본당으로서 첫 출발을 하는 날 이 본당의 제1대 주임사제(司祭)로 온 <알로이시오> 김(金兌浩) 신부는 그를 맞이한 신자들 앞에서 위와같은 포부와 결의가 엿보이는 간단한 인사를 하였다.
낙동강(洛東江) 하구(河口)가 있는 김해(金海) 평야는 경남의 곡창(穀倉)으로 알려졌지만 가톨릭 교회사에서 볼 때 1954년 예수회의 <세스피네스> 신부가 그 당시 『곰내』라 불리운 이 김해군 내의 웅천(熊川)에 상륙하여 한국땅에서 최초의 미사성제가 올려졌던 유래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장이 3백60여년전 그때나 포교사정에 있어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개척지로서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부산을 70리, 마산을 백리, 그리고 이 군내에 있는 또하나의 읍(邑)이며 본당이 있는 진영(進永)을 40리 거리에 둔 이곳 김해읍은 30개읍면(邑面)의 행정중심지로서 군청 세뭇 등기소 등의 농은(農銀) 상은(商銀) 대리점 같은 금융기관과 3개의 중고등학교가 있으며 인구는 2만명을 헤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교우는 불과 40여명이며 이 본당의 관내에 있는 울만(蔚滿) 상덕(上德) 주촌(酒村) 초선대(貂仙臺) 평촌(平村) 등 5개처의 공소를 합하여 현재 약 4백명의 교우가 있다.
이 포교의 개척지는 김해김씨(金氏)의 문벌관계로 씨족(氏族) 세력이 강한 곳이며 종교세력으로서는 비교적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편이라 장노교 침례교 재건파 성결교 등이 읍내에만 6개처의 예배당이 서있고 천리교(天理敎)도 있다.
그러나 지방유지인사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본 각 교파(敎派)에 대한 채점(採點)은 『예수교를 믿을바에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는 편이다.
<세스피데스> 신부가 상륙하였다는 『곰내』는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약70리 떨어진 곳이며 본당이 되기까지 그동안 삼랑진(三浪津), 진영, 부산 범일동 등 여러본당신부님들이 이 지방 교우를 보살펴주셨다.
동상동(東上洞)에 자리잡은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57년 2월초에 그당시 진영본당 주임으로 이 지방 교우들을 사목(司牧)하던 <요안> 정(鄭三圭) 신부님이 신축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어려운 사정도 많았고 또 그후 정 신부가 마산으로 전임됨에 따라 공사는 자연 지연되어 오다가 <알로이시오> 김 신부가 본당신부로 임명되어 준공을 보게 되었는데 부지 1,070평에 건평 71평 되는 벽동집 성당은 3·4백명 교우를 수용하기에는 아직 협소함을 느끼지는 앟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관과 교리를 가르칠 집회실은 없음으로 집을 또 지어야 할 걱정이 있다. 성당 신축공사를 처음 착수했을 때 이 지방 교우들은 순전히 그들의 근로봉사로써 기초공사를 끝냈으며 주촌(酒村) 공소에 있는 <베드루> 조(曺용煥)씨는 4개월동안 공사감독을 맡아 봉사해왔다 한다.
이 읍에서 약3키로 떠러진 곳에 공병(工兵)학교가 있고 또 성당 바로 옆집이 장교(將校) 구락부집으로 군인들 가운데는 교우장병도 간혹 있을 것이나 지금까지 신부님이 안계신 곳이기 때문에 군인으로서는 아무도 성당을 찾는 사람이 전연 없었다는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성직자의 손이 부족한 한국교회의 비애(悲哀)가 이러한 면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부산교구 신부님들 가운데서도 열정적이요 적극파(積極波)로 알려진 김 신부님을 이 신설교회의 첫본당 신부로 임명한 최 주교님의 의도하시는 바를 짐작할 수 있으니 『포교의 개척지』라는 교회 안에서 명예롭지 못한 딱지가 떨어지는 날이 결코 머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