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는 공연이 끝난 극장 속의 혼잡을 헤집고 극장 정문께로 달려나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를 처음 만났다.
새카만 양복 왼쪽 주머니 위에 진홍장미를 꽂고 이성근은 혼잡을 헤집고 달려오는 미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부셔하는 미사 앞에서 이성근은 훤칠한 큰 키와 세련된 몸가짐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뛰어난 용모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순식간에 미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사는 앗차하는 사이에 휘황한 불빛 속에 뛰어들어 정신을 잃어버린 한 마리의 눈먼 불나방이었다.
그는 독재자이면서도 페미니스트였다. 늦추고 당기고 하면서 이미 눈멀어 버린 미사를 꼼짝없는 정화(情火)의 수인(囚人)이 되게 만들었다.
그에게 넋을 잃은 사람이 비단 미사뿐이었을까.
미사의 어머니 올케 나이어린 미리까지도 스포츠로 단련된 굳센 그의 체구 앞에서는 위압을 느꼈고 그가 풍기는 온갖 남성적인 요소에 흠뻑 심취해버렸다.
다만 미사의 아버지인 한동휘 장군만은 냉정한 눈길을 잃지 않았다.
이미 예비역으로 정부의 고위부처 의장이 되어있던 한 장군만은 집안의 여자들처럼 덮어놓고 이성근을 추켜세울 수만은 없었다.
이성근은 미구에 그의 사위노릇을 하기 위해서인지 한 장군에게 끔직히 충직스러웠다.
그는 미사에게 보다도 한 장군에게 더 열을 올리는 사람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미사는 응석처럼 트집을 잡았다.
『저를 더 좋아하세요? 아버질 더 좋아하세요!』
사실 그런 소리는 되지도 않는 소린 줄 잘 알고 있었다.
이성근은 평소부터 한 장군을 흠모해 왔다고 했고 자기는 돈을 벌어서 한 장군의 정치자금을 대겠다는게 입버릇이었다.
딸과 아내를 통해 이성근의 말을 듣고 한 장군은 몹시 못마땅해 했다.
『엉뚱한 놈이로구나 나는 정치를 하지 않는다. 나는 예비역으로 돌았지만 죽을 때까지 군인일 뿐이고 사정이 허락된다면 조그만 육영사업이나 벌였으면 하는 것뿐이다.』
한 장군의 말은 어느새 이성근에게 전달되었고 이번에는 육영사업에 필요한 자금이라도 대겠다는 간접전갈을 받고는 그는 버럭 역정을 냈다.
『교포 실업가로 돈이 얼마나 되는진 몰라도 어쩐지 수상한 놈이니 미사도 그 이상 가까이 하지 말라고 일러요.』
아내를 통해서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미사를 직접 불러서 엄중히 타일렀다. 물론 아버지 앞에서는 그의 명령을 거스릴 수는 없다.
이성근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말했으면서도 미사는 이미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완연히 그의 포로였다. 행복한 포로였다.
아버지의 승락이 끝내 떨어지지 않는다면 집을 뛰쳐나갈 각오마저 되어있었다. 아버지를 저토록 존경하고 흠모함으로써 그의 팔다리가 되고 싶다는 이성근을 왜 그토록 꺼리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느닷없이 이성근은 체포되었다.
간첩혐의였다.
이성근과 한미사의 관계는 만천하에 공개되고 그의 아파트에서 즐거운 한때를 지내면서 찍은 사진까지도 신문에 났다. 미사는 무어가 무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건 무슨 오해다! 끔찍한 음모다! 그가 간첩이었다곤 그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어느 구석에서도 그런 기미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한 장군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가문에 흙탕물을 칠한 딸을 내쫓아버렸다. 미사는 그래도 좋았다. 이성근에 대한 믿음이 남아있는 한 아버지에게 추방당한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미사의 믿음은 소용없었다.
자백뿐만 아니었다. 그는 미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이용하여 한 장군에게 접근하려고 했다고 술회했다. 미사의 절망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녀는 아무도 믿는 것이 없어져 버렸다.
인간도 사랑도 우정도 아무것도 믿는 것이 없었다. 얼마 후 이성근은 감방에서 혀를 끊고 자살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그 이유는 죽은 당사자밖에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품어오던 이데올로기의 허무를 느꼈기 때문인지 더 큰 죄상을 숨기기 위해선지 죽어갈 때나마 미사의 생각을 떠올렸는지 어쨋는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미사가 이렇게 혼자 남아있을 뿐이다. 나라를 배반한 자와 정을 통한 딸을 가진 아버지는 남 보기가 민망해서 이민을 떠나버렸다.
미사는 연거푸 소주잔을 들이켰다.
문득 약속시간이 생각나 몽롱한 눈길로 시계를 들여다보았으나 이미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해버린 후라는 것을 알았다. 에라 이대로 주저앉자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목소리가 예관수라는 것을 깨닫자 미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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