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가 렌트겐을 찍고 촬영실에서 나오니 예관수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들고있던 그녀의 코우트를 입혀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잠바를 벗어서 말없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이번에는 자기 옷을 그녀가 맡을 차례였던 것이다.
역시 촬영실의 번잡을 피하기 위해서는 겉옷을 미리 벗고 들어가는 게 편리하다는 걸 미사는 좀전에야 체험했다.
미사에게 코우트를 입히고 자기 옷을 맡기고 하는 일련의 동작들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미사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며 지내온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색바랜 그의 잠바가 처음에는 그의 육체의 일부처럼 어색하고 어렵게 느껴지더니 잠시 후에는 다정한 손길이 몸 가까이 뻗쳐있는 것처럼 흐뭇하게 여겨져 미사는 스스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약해져 있는 모양이라고 미사는 생각했다.
『결과는 두시에 나옵니다』
촬영기사의 말이 아니라도 그것은 이미 알고있는 사실이다.
병원에서 나오는 바깥은 아직도 늦가을의 오전 열한시를 조금 넘었을뿐이다. 두시까지 어디서 무얼하며 시간을 보낼까.
미사는 코우트 깃을 울리면서 막연한 눈길을 발뿌리에 부딪는 낙엽위에 쏟았다.
『그럼 이따가 다시 뵙죠』
몸뒤에서 돌리는 사나이의 목소리에 미사는 제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꽤 오랫동안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시죠?』
미사는 그렇게 묻고있는 자신에게 몹시 놀랐다. 그렇게 묻는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전에 이성근(李星根)에게 온 정신이 빠져 있을때 그와 헤어지기 싫을때면 으례 그렇게 묻곤했었다. 그럴때마다 그는 안면근육을 긴장하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 소리를 묻는 것이 금구(禁句)였던것이다.
『미사는 내게 아무것도 물어서는 안돼. 내가 미사에게 나타날때. 그 순간만이 우리들의 전부야 알았어?』
물론 그런소리를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이성근은 미사에게 그렇게 명령하는것만 같았다.
『저는 인천에 잠간 내려갔다 올 일이 있어서 그리루 가겠습니다만…』
인천이란 말에 뒤미쳐 떠오르는 연상이 갑자기 미사에게는 희망이 되는것 같았다.
『인천엔 바다가 있지요?』
그녀는 백지같은 진지한 눈길로 그에게 말했다.
『그렇구 말구요. 인천에도 바다가 있지요』
유치원 부모같은 말투로 예관수는 웃었다.
미사는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리고는 변명처럼
『왜 직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인천에 바다가 있다는걸 모르진 않았는데 그 바다에 갈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거던요』
아무튼 지금 바다 생각이 난 것은 미사에게 뜻밖의 구원이 된 셈이다.
미사가 인천행을 결정하자 예관수는 기차로 갈 것이냐 고속으로 갈 것이냐를 물었다.
미사는 기차를 타보고 싶었다. 한시간이면 왕래하는 서울 인천간 기차를 미사는 한번도 타본적이 없었다. 기차표를 살 때 미사는 기차삯을 자기가 지불하겠다고 우겼다.
『그럼 이따가 올라올때 한 선생이 끊으십시오』
그녀를 달래듯이 그가 말하니 미사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럼 올라올때도 동행할수 있어요?』뜻밖이라는 듯이 반문했다.
『오늘만은 우리의 운명이 하납니다. 그렇지 않아요? 인천에 갔다가 올라와서는 같이 결과를 보러 가야하는게 아닙니까?』
『그렇군요』
미사는 순순히 동의했다. 나쁜운명이든 좋은운명이든 운명을 같이 할 사람이 있다는건 요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웬일인지 미사는 수다스러웠다.
예관수는 과묵한 사람이었는데 미사는 그가 자기만큼 말을 잘한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예관수는 미사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 것이다.
동인천 역에 내리자 그들은 일단 헤어지기로 했다.
한시간 동안에 미사는 바다를 보고 예관수는 볼일을 보고 정각 한시 반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는 택시를 잡아 미사를 태웠다.
월미도로 가서 바다를 보고 시간이 늦지않게 오라고 다짐했다.
미사는 미끄러지는 차창 너머로 역앞의 지하도로 급히 내려가는 예관수를 물끄러미 내다 보았다.
그의 볼일이란 무엇일까 하고 막연히 상상해 보기도 했다.
『바닷바람이 차가울 텐데요』
운전사가 늦가을에 바다를 찾아가는 미사의 마음을 헤아릴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바다를 본다는 기대때문인지 미사의 마음은 공연히 조급했다.
월미도 버스종점에서 차를 버린 미사는 살결을 에이는듯한 바닷바람을 헤치며 달려나갔다.
희뿌연 서해의 바닷물이 출렁출렁 넘쳐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사는 두 팔을 날개처럼 벌리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시원하기는 커녕, 무언지 걷잡을수 없는 슬픔이 노도(努濤)처럼 그녀의 가슴을 철썩철썩 때린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