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는 바람이 거셌다. 미사는 코트깃을 세우고 희뿌연 바닷물이 고여들기 시작하는 방파제를 따라 걸어갔다.
방파제에서 공사를 하던 노동자들이 호기심 서린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며 스쳐가기도 한다.
계절탓이다. 바다에는 외딴 섬처럼 쓸쓸했다.
게슴치레한 하늘과 희뿌연 바다가 경계선도 묘연하게 잇닿아 있는 곳에서 외국상선일까, 배 한척이 아득히 내다보인다. 배는 그녀의 마음길을 멀리 남미(南美)쪽으로 치달리게 했다.
가족들이 있는곳…
불현듯 목이 말랐다.
가슴속에서 아우성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미사의 병 가운데서 가장 흉악한 병이다.
그녀는 가슴에 몰잇군의 아우성 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쫓기는 미사의 운명의 소리같은것이다. 이 소리가 요란해질때 그녀는 술이 아니고는 진정시킬수가 없다.
미사는 견딜수가 없었다.
체면 불구하고 마침 길가에서 정지작업을 하던 한 노동자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 간단한 음식 같은것 파는 집 있을까요?』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라면이나 소주 따위를 팔기도 하는집이 있을법한데 눈에띄는 것이라곤 공사진행을 위한 사무실같은 건물만 벼랑위에 덩그러니 내다보일뿐이다.
철늦은 바닷가에 여자 혼자 찾아온 것이 아무래도 수상쩍은지 노동자의 눈빛은 심상치 않게 미사의 아래 위를 훑으면서도 말만은 친절하게 사무실이 있는 벼랑밑 쪽을 손가락질 해주었다.
『철이 지나도 돌아가지 않고 있는 한 집이 저 벼랑밑에 있어요. 지금은 공사판 노동자나 해안 경비원들만 상대로 장사하는 집입죠』
벼랑밑에 그런집이 있으리라고는 뜻밖이었다. 방파제로 바싹 나가서 건너다보니 과연 벼랑 밑 큰바위에 바람에 날릴듯한 판자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만조(滿潮)때는 오두막이 위험하지 않을까 싶으리만큼 바다와 밀접해있는 판자 오두막, 오두막까지 내려가는데는 미사의 하이힐이 성가실 지경이다.
가까스로 당도해보니 판자집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넓었다.
간판도 안붙은 그 집 문앞에는 물함지속에 멍게나 해삼전복 따위 해산물이 약간씩 구색만 갖추려는듯이 담가져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에서 여주인인듯한 중년여인이 반갑게 맞이해준다.
바닷가 여인답지않게 곱살스럽게 생긴 사십대 여인이다.
『혼자 오셨어요?』
『네. 바다 좀보려구요. 곧 가야하는데 그동안 뭣좀 요기라도 하려구요. 』
『지금은 라면밖에는 안됩니다만…』
『아주머니 소주 있지요?』
주인아주머니는 놀라는 기색을 애써 누르는 기색이었다.
『있지요. 있구 말굽쇼. 이리 올라오세요 . 바다를 보시려면 누추하지만 이곳이 더 좋으실거예요. 』
여인이 인도한곳은 살림방이었다. 창이 뚫려져 있어 과연 전망이 좋았다.
깔끔한 성깔인지 방안은 단정히 정돈되어 있었다.
젊은 여자가 혼자 바다를 찾아와 소주를 찾는다는 것을 보니 가슴에 멍깨나 든 여잔가 보다고 주인 아낙네는 맘껏 선심을 쓰려나보다.
난생 처음보는 여인에게 미사는 그 순간 짙은 인정을 느꼈다.
여주인은 미사앞에 소주병과 안주접시를 늘어놓아 주고는 그녀를 혼자있게 해주려는듯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미사는 목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불길같은 소주맛을 감로(甘露)처럼 음미했다.
처음 몇잔은 연거푸 들이켰다.
서서이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상념은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된다. 녹작지근한 취기속에 훤히 트인 바다가 내다보인다. 만조를 앞둔 바다가 서서히 풍량해지기 시작한다.
철석거리는 파도의 포말속에서 잘생긴 한 사나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취기로 몽롱해진 미사의 눈길이 파도속에 떠올랐다. 꺼지곤하는 사나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웅시한다.
이성근(李星根)이 그녀앞에 나타났을때가 지금까지의 미사 생애 중에서 가장 화려하던 때였다.
대학연극제가 끝나던 날이었다.
주연을 맡았던 한미사 앞으로 핏빛같은 진흥 꽃다발이 전달되었고 꽃다발 가운데 은빛깔의 네모난 봉투가 들어있었고 봉투속에는 여지껏 그녀가 본적도 없었으리만큼 남성적인 달필로 다음과 같이 쓰인 쪽지가 들어있었다.
<공연 사흘동안에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오필리어를 찾았소. 물속에 잠길 아름다운 오필리어! 그대가 물속에서 나오는 오늘 열시 정각 극장앞에서 그대를 기다리겠오. 내 가슴에는 그대에게 전할 진흥장미가 꽂혀있다오. 진흥장미는 내가 그대에게 드리는 갈채의 표시요. 이성근.
미사가 출연한<햄리트>의 오필리어역을 사흘동안이나 꼬박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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