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엽다고 어루만지시는 사랑의 「손」그늘이 결국 『나의 우울』이었음을 탄식하는 그는 자주 깊은 사색에 잠기었기 때문에 중대한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기가 일수였다. 따라서 친구들의 신용을 잃었고 자기 누이의 편지마저 1년동안이나 뜯어보지 아니했던 일도 있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수줍어서 말도 잘 못햇으나 우수운 이야기를 들으면 남들 앞에서도 어린애같은 웃음을 한참동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메이넬>을 만난 후 2년동안 간신히 끊었던 아편을 더욱 더해가는 심신의 고통 때문에 다시 시작햇으나 48세를 일기로 어느 「런던」병원에서 객사(客死)할 때까지 순결과 미(美)에 대한 탐구의 고민이 그의 영혼으로 하여금 신(神)에게 더욱 접근하게 하였다.
대도시의 암흑면에서 얼고 굶주리던 때의 비참을 노래하여 신세 진 <메이넬>집의 딸들에게 바친 「자매(姉妹)의 노래」가 1895년에 「신(新)시집」이 1897년에 「전집」3권과 「이냐시오 로요라성인전」이 그가 종부성사를 받고 죽은 6년 후인 1913년에 출판되었다.
교회의 역대 신비가들의 저서에 정통했던 그는 자신도 역시 신비가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신비체험이 거룩한 성당 안에서나 혹은 수도원 안에서나 황량한 사막에서나 깊은 산중의 은수처(隱修處)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속되고 속된 죄악과 소란과 갈등의 속세에서 그 중에서도 가장 음달진 모퉁이에서 그위에 병고와 기갈과 마약중독과 괴상한 습관과 게으른 천성과 무책임한 방랑에서 우러났다는 점이 현대의 우리와 공감되고 마침내 우리와 같은 인간을 절망에서 건져줄 뿐 아니라 희망과 격려를 주는 것이다.
그의 작품가운데서 추린 그의 묘비명(墓碑銘)이 『하늘의 육아실(育兒室)에 와서 나를 찾아주소』라고 말하는 그의 동심(童心)도 남달으거니와 무엇보다도 신(神)의 크신 사랑이 그처럼 한량없으심을 그처럼 도저하심을 지긋지긋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그의 예술이다.
그가 맨손으로 처음으로 서울에 갔을 때 <아이스키로스>의 극시집과 <불레이크>의 시집이 그의 전 재산이었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안빨리는 골통대들과 안써지는 펜들과 심지없는 남포등과 아니뜯긴 봉서(封書)들이 그의 전 유산이었다.
그의 작풍(作風)은 가톨릭시인인 <크라쇼우>와 <파트모어>의 영향과 동시에 <셀리> <쉰버언> <로세티>의 영향을 받았고 죽어서는 『참다운 시인, 많지 않은 시인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의 내용인 그의 지상적(地上的) 고민만은 질로나 양으로나 누구의 영향도 아닌 자기 독특한 것이었고 그 자신은 이 지상에서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서 그야말로 거지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거지』이다. 그랬기에 그 『사냥개』의 발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어른」의 발소리도 들었다.
그가 19세기에 탄생한 17세기의 형이상(形而上) 시인이라는 문학사(史)상의 규정도 옳지마는 「하늘의 사냥개」한편 때문에 「두말할 것도 없이 <프란시스 톰손>은 바야흐로 신앙의 영원한 신비를 들어낸 또 하나의 시인이며 그의 위대성은 그로 하여금 세기를 초월하여 만대(萬代)의 사람이 되게 하였다.」
(홀부무크 쟉손)
그러나 나는 후세의 동양인으로서 이제 이 「거지」「아편장이」「농띵이」안에 그야말로 처렴상정(處染常淨)한 이중연화(泥中蓮花)의 진면목(眞面目)을 발견한다. 그러나 살아서 「렴」(染)과 「이」(泥)에 저항하면서 『하늘의 임』을 그려서 『고민한 연화』이다.
백마디 평론보다는 다만 한토막이라도 그의 작품을 하나만 더 읽어보자.
□ 하늘의 사냥개
낮과 밤을 이어
<그>를 피해 나는 달아났다.
내 마음 속 꾸불 꾸불 미궁(迷宮)의 길.
이리 저리 도망쳐 헤메고 있으면
통곡이 일다가 끝없는 웃음소리
나는 <그>를 피하여 몸을 감춘다.
뒤쫓는 우렁찬 저 <발>소리
혼돈(混沌)한 공포의 광막(廣漠)한
암흑을 뚫고
아련히 비최는 희망을 향하여
달음치며 뛰어넘다 꺼구러진다.
유유히 쫓아오는 태연한 걸음새
너 엄위(嚴威)서린 그 발울림 그 박력(迫力)으로
『나를 버린자여
일체가 너를 버릴진저……』
金益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