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를 영화화(映畵化)하는데 지난 1950년 죽음의 행진을 몸소 겪은 주교 신부들이 출연하고 있다.
즉 춘천 <토마스 귄란> 주교와 <윌리암 부드> 신부 <필립 크로스비> 신부 그리고 <세레스땡 고요> 신부 등 그 당시의 참변을 실지로 당한 분들이 화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자는 「뉴지랜드」의 <죤 보간> 신부와 「아이랜드」의 <시 A. 듀너> 신부 두 분이다. <보간> 신부는 이미 일본과 「피지」도 등에서 9개의 선교사(宣敎史)를 제작한바 있으며 <보간> 신부는 앞서 「칼리포르니아」대학에서 2년간의 「필림」제작법을 수업하였다.
천연색으로 된 이 영화는 한국에 첫번 구라파인 선교사가 고심끝에 입국하는 장면과 초대의 박해장면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는 <크로스비> 신부의 홍천본당과 그곳 교우들이 등장한다. 이곳은 심한 산악지대이어서 『죽음의 행진』을 그리기에 편리한 점이 많으며 가령 현대시설인 전신 전화줄 같은 것으로 인한 초대적을 표현하는데 다른 장애를 받지 않는 곳이다.
죽음의 행진은 미군 포로 민간인 그리고 선교사들이 1950년 10월 31일과 11월 8일 사이의 한냉(寒冷)해진 날씨에 135마일의 산악(山岳)길을 도보로 북행한 기록이다. 이 행진을 지휘한 자는 병자와 노령자에 대한 잔인으로 「호랑이」라는 칭호를 받은 1북한공산군의 소좌(少佐)이었다.
출발시의 인원은 726명의 미군 59명의 민간인 11명의 신부와 6명의 수녀들이었다. 그중 40명은 다른자와 같이 취급할 수 없을만큼 약하다는 것으로 총살되었고 백여명은 행진과 그들의 홀대로 수용소에서 병사하였다.
3명의 민간인은 행진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중에 <베아뜨리 에두아르> 성바오로 수녀원장은 다른자와 같이 행동하지 못하므로 총살당하였다. 18명의 다른 민간인도 그해 겨울에 사망하였는데 그 중에는 <파트릭 번> 주교(메리놀회)도 있다. 그는 공산침략 당시 주한 교황사절이었다.
이 영화는 특히 종전(終戰) 후의 한국의 신앙의 발전상을 기록한 것으로 사실상 1953년 당시의 166,000 신자는 450,000으로 3배나 증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