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구 감목 <바오로> 노 (盧基南) 주교는 금년 사순절(四旬節)을 맞이함에 있어 그 목장(牧杖) 아래 있는 모든 신자들을 향하여 다음같은 멧세지로써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행위로써 통회 보속하며 극기(克己)하는 정성을 표시해야 하고 신앙하는 바를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써 특히 교회유지(維持)에 있어 교우들의 본분에 대하여 각성을 촉구하였다.
멧세지
『행실이 없는 신덕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버서 2장 17절)
우리는 2, 3일 후에 40일 봉재성시(封齋聖時)를 맞이하게 되었읍니다. 자모이신 성교회에서 40일 봉재때를 정하신 이유는 교우들로 하여금 이왕 죄를 통회(痛悔) 보속(補贖)하며 고신극기(苦身克己)함으로 공을 세우고 예수의 수난(受難)을 묵상함으로 예수의 부활(復活)주일을 잘 예비하라 하시는 의도(意圖)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정신대로 봉재때를 지내기만 한다면 우리 영혼에 많은 공로와 덕행을 쌓을 수 있을 것이요 예수 부활 주일을 맞이할 때는 우리 영혼도 예수와 같이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봉재성시를 교회 정신대로 마음과 생각으로만 통회 보속의 정신을 가질뿐 아니라 실지 육신의 행실로써 통회 보속을 실행하여야 됩니다. 혹자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즉 천주는 신성하신 자시요 진리와 정신으로 당신을 흠숭하는 자를 원하시는 자이신 즉 마음과 진리로 통회 보속의 생각을 가지면 족하지 외부적인 육신의 행동이 무슨 필요냐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성경에 행실이 없는 신덕은 죽은 신덕이라 했읍니다. 육신의 행실이 따르지 않는 통회 보속은 거짓 신덕이요 죽은 신덕임을 우리는 명심(銘心)하여야 되겠읍니다. 예수께서도 입으로만 천주를 찬미하며 행실이 없던 당시의 유데아인들을 꾸짖어 말씀 하시기를 이 백성들이 입으로는 나를 흠숭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내게 멀리 있도다 하시며 책하였읍니다. 우리가 40일 봉재때 통회 보속을 행실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진실한 신덕만 있다면 우리 직무에 그렇게 큰 손해없이 실행할 수 있는 통회 보속의 길이 많습니다. 비컨데 봉재때는 매일 미사 첨례를 빠지지 않고 통회 보속하는 뜻으로 더욱 열심히 하기로 결심(決心) 실행(實行)한다든지 혹은 봉재때 매 금요일에는 꼭 성로(聖路)신공을 보속의 정신으로 실행하든지 혹은 40일동안 술이나 담배를 끊기로 결심 실행한다든지 등등 얼마든지 마음만 있으면 실행할 수 있는 좋은 통회 보속의 행실들이 있읍니다.
사실 다른 여러나라에서는 많은 신덕있는 교우들이 이런 일을 봉재때마다 실행하고 있읍니다. 우리가 신문 잡지를 통해서도 잘 아는 일이지만 수년(數年)전부터 「오스트리」가톨릭 부인회에서 수만불(弗)의 기부금을 우리 한국교회로 보내고 있읍니다. 이 거액의 기부금을 어느 한 두 사람의 부자(富者)가 주는 돈이 아니고 「오스트리」전국의 가톨릭가정부인들이 각 가정에서 하루(1日) 대제(斷食)를 지키므로 절약해 모은 돈이라 합니다. 또 서독에서도 MISEREOR(내 불상히 넉이노라)이라는 8백만불에 달하는 기관에서 작년도에 거액으로 다른 여러나라의 교회 사업을 후원하고 있는데 이 막대한 금액도 몇몇 부유한 사람의 기부가 아니고 전 서독 교우들이 봉재때 한 주일간 대재(大齋) 혹은 소재(小齋)를 지키므로 절약해 모은 돈이라 합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일들이며 본받을만한 표양입니까? 참으로 저네들은 행실이 있는 산 신덕을 가진자들이라 하겠읍니다. 또 저네들은 이러한 봉재때 선행을 하기에 앞서 자기본당, 자기교구, 자기나라 교회에 대하여는 교우의 모든 본분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읍니다. 즉 본당 혹은 교구 혹은 국내 교회의 모든 기관 모든 사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경비를 각자가 의무적으로 거출하고 있읍니다. 그네들은 자기의 본교회를 위하여 할 일을 먼저 다 한 후 다시 다른 나라의 교회를 위하여 위에 말한 선행(善行)을 실행하고 있읍니다.
나는 구미(毆美) 여러나라로 다닐 때에 그곳 교우들이 자기 교회에 대한 의무(義務)를 어떻게 실행하고 있나 유의해 본 일이 있었읍니다. 즉 교우들이 교무금(敎務金)이나 주일 연보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가 살펴 본 일이 있었읍니다.
미국 같은데는 교회의 모든 필요한 운영비를 대개 미사때 연보로 거두고 있읍니다. 주일 미사때마다 한번뿐 아니라 두번 혹은 세번까지 연보를 거두고 있는데 매 연보의 목적이 따로 있읍니다. 가령 첫 연보는 본당 유지를 위하여 둘때 연보는 교구의 어떤 사업을 위해 세째 연보는 수도회를 위해 이렇게 같은 미사에 두세번 연보 거두는 것을 보았읍니다. 본당신부가 미리 교우들에게 한 주일 혹 두 주일 전 무슨 목적(目的)으로 연보 거둘 것을 예고(豫告)하고 연보의 목적과 그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교우들은 신부의 강론으로 미리 알고 매 연보에 자기의 처지에 해당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고 왔다가 매 연보에 흔연히 바치고 있읍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까지 연보를 준비해주고 아이들까지 자기 손으로 연보를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신부들 자신들이 연보 주머니나 바구니를 들고 각 사람 앞으로 나가며 연보를 거두고 있읍니다. 나도 어떤 본당에서 세째번 연보를 거둔 일이 있었는데나와 양(梁) 신부가 연보 바구니를 들고 거둔 일이 있읍니다.
서독(西獨)교회서는 모든 교우들이 교회유지(維持)운영을 위하여 바치는 교무금이 있는데 이를 교회 당국에서 받지않고 국가에서 세금으로 증수하여 교회 당국으로 보내면 교회당국 즉 주교는 그것으로 교회 모든 운영에 충당하고 있읍니다. 서독 모든 국민들은 이미 각자 호적(戶籍)에 종교란(宗敎欄)이 있어 각자 자기의 종교를 표기(表記)하게되어 있는데 정부에서 각자의 재산(財産) 정도와 수입 정도를 참작하여 각 사람에게 해당한 세금을 책정할 때에 종교세(宗敎稅)도 같이 책정하고 다른 세금과 같이 증수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현재 각 사람의 종교 세금을 각 사람 월수입(月收入)에 백분지 2率 정도로 책정 증수한다합니다. 이렇게 증수된 종교 세금을 각 종교별로 각 교회 당국으로 보낸다 합니다. 이렇게 서독 교우들은 이미 교무금을 국가 세금과 같이 교회에 헌납하고 있읍니다. 「스위스」에서는 각 본당에 교우로 구성된 경제위원회(經濟委員會) 같은 것이 있어서 거기에 자기 본당 혹은 교구 운영의 필요한 경비를 예상(豫想)하고 각 사람 재산과 수입 정도를 표준하여 각 사람에게 해당한 금액을 책정합니다. 이렇게 책정된 예산안을 정부에 제출하면 정부에서는 교회운영회에서 책정한
그대로 각 사람에게 세금과 같이 증수하되 미잡자(未納者)가 있을 때는 차압까지라도 하여 국가 세금과 똑같이 증수한다 합니다. 서독이나 「스위스」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이런 교무금은 비단 각 신자에게 뿐 아니라 어떠한 공장이나 회사나 기관에까지 그 공장 회사의 연수입(年收入)을 봐서 국가 세금과 같이 교회에 바치는 세금을 책정하고 국가 세금과 같이 증수합니다.
이상 여러나라의 교무금이나 주일 연보의 현실을 보든지 또는 종도(宗徒)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교회 전례를 보면 언제든지 교회의 성제사를 위하고 교회 여러가지 사업을 위하여 교우들이 필요한 물질을 교회에 바쳐왔읍니다. 이것은 교리(敎理)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명하는 일입니다. 고교(古敎)때에 이미 천주께서 「레비」지파 자손에게는 산입 분배에서 제외시키고 그대신 다른 지파 자손들에게서 자기수입 10분지 1을 「레비」자손에게 바치라고 명하셨고 유데아 백성들이 이를 실행하여 왔읍니다. 그러므로 교무금이나 주일 연보는 교우들이 천주의 계명에 의하여 천주께 바치는 예물(禮物)이라 하겠읍니다. 바쳐도 그만 안바쳐도 그만인 순전한 애긍이 아니고 의무적으로 당연히 바쳐야 할 헌금(獻金)이 올시다. 그러므로 성당에서 신부가 교우들에게 연보를 재촉하고 연보 주머니를 들고 나가는 것은 교회정신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뿐 아니라 신부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자기의 성무(聖務)를 실행하는 것이라 하겠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 제헌으로 고교때 모든 제헌에 대치(代置)하셨으므로 지금 우리가 소나 양을 잡아 제헌할 필요는 없지만 제헌에 필요하고 도는 교회의 필요한 물질을 천주께 바치는 봉헌의 정신과 예는 예수께서 폐찌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종도행전이나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교우들이 미사 성제시에 여러가지 물질을 집적 제대 앞으로 가지고와 봉헌했고 종도들과 성직자들이 이 예물을 직접 받아 들였읍니다. 이러한 교회의 정신과 전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성당에서 돈에 대한 말을 하면 교회 정신에 어긋나는 줄로 오해하는 자가 있다면 신부로서 당연 이런 교우들에게 연보에 대한 강론을 함으로 교우들을 각성시켜야 마땅합니다. 물론 『천주의 즐기시는 제(祭)는 크게 서러워하는 마음이라』하였읍니다. 천주 앞에는 마음에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열심하나만을 알고 물질적 행동의 의무는 오불관언(吾不關言)하는 태도를 가지는 자는 그 마음의 열심은 그릇된 열심이요 그의 신덕은 행실이 없는 죽은 신덕이 되기 쉽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교우들에게 거듭 장조하는 바는 40일 봉재 성시에 마음으로뿐 아니라 행실로 통회 보속을 실행 하시라!
봉재성시가 지난 후에도 우리는 언제나 마음에 열심으로뿐 아니라 행동으로 신덕을 실천하는 교우가 되시라. 『행실이 없는 신덕은 죽은 신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