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간에 우리는 부활을 예비하기 위하여 교회의 보편적인 봉재(封齋)를 시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더욱 깊이 뚫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봉재의 문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 생활의 열쇠를 발견합니다.
이 주일 복음에 예수께서 종도들에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 붙임을 당하시리라고 예고 하십니다. 당시의 종도들과 같이 우리도 그 어른께서 무슨 연고로 죽으셔야 하는지 놀라며 이해할 수 없읍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죽으시려는 직전에 당신의 종도들을 부르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그 대답을 주십니다. 『누가 그 벗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다』(요왕 15장 13절)
천주는 「사랑」이시니 이 천주께서 인간세계로 내려오실 때 당신의 벗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므로써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셔야 했읍니다. 그러한 「사랑」이 그리스도신자 생활의 열쇠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어른의 「사랑」의 차기에 따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받징아니하는 한 자기의 「사랑」이 증명되지 아니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성녀는 『고난을 아니받을 진데 차라리 죽음을 받으리라』고 주장하였읍니다. 그리스도께서 『폴리뇨의 안젤라』에게 『내가 너를 택한 것은 웃기 위함이 아니로다.』라고 말ㅆ므하셨읍니다. 형제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생각이 없는 「사랑」을 진실한 그리스도신자의 「사랑」이 될 수 없음이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신자의 「사랑」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성 바오로>가 서간경에 설명합니다. 그의 표어는 『무엇보다도 애덕』입니다. 그러므로 애덕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무엇보다도 앞서는 첫째 의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는 고해성사를 살펴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고명하는가?
금요일에 육찬을 먹었을 때 조과나 만과를 잊었을 때 미사를 궐했을 때 그것을 기억하여 고명합니다. 그것은 해야할 선행(善行)입니다. 혹은 심지어 정결(貞潔)을 거스리는 과오 때문에 우리는 가끔 대단히 번민합니다. 물론 우리 육신의 약점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애덕을 거스리는 우리 과오를 잊지 맙시다! 만일 「사랑」이 그리스도신자 생활 가운데서 첫째가 되는 계명이라면 애덕을 거스리는 과오가 인간 생활 가운데서 제일 악한 과오입니다! 「사랑」을 거스리는 과오가 우리 죄의 고명에 있어서도 첫째 자리를 차지해야 하겠읍니다.
천주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면서 거기에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 발견해 내십니다. 『나는 너희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제 형제에게 분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죄인이요 제 형제더러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공회의 죄인이 되 럯이요 미친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의 죄인이 되리라.』(마두 5장 23절)
봉잿 동안 우리는 우리 죄를 보속합시다. 우리 육신이 또한 그 약전 때문에 우리를 유감(유혹)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대재(禁食)를 지킵시다. 집착에서 해탈되어 사랑하는 시간을 얻기 위하여 만사에 있어서 욕망을 제어합시다. 어느 때보다 더 많이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에페소 3장 19절) 『그리싀도의(우리에게 대한) 총애를 (옳게) 인식할 수 있으리라. 이로써 너희는 천주의 온갖 충만하심으로써 충만하여질 것』(에페소 3장 19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서기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