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있어 참시인은 드물다. 참작가 소설가는 괴테가 Dichtung이라고 부르는 시문학(詩文學)을 제작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작품은 시(詩)라는 「그레시아」원어(Poesia)가 뜻하는 하나의 창조(創造)이다.
시인은 창조자다. 그러나 원창조자인 신(神)과 그의 조물(造物)들에 대해서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게르트투트 폰 러 포르>는 시인인 것이다.
현대 「그리스도교의 작가」에 있어서 <폰 러포르>만치 높고 깊고 넓은 위상(位相)을 가지며 모든 상이한 진영에서 존경받고 용납되는 작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문학은 종교적이며 그를 신비주의적이라고 하나 <폰 러 포르>의 문학은 그렇다고 종교적문학(宗敎的文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진정한 문학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것이다. 이런 뜻으로 고유적(固有的) 「그리스도교 문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폰 러 포르>의 문학의 특색을 구태여 무리해서 들어보면 그의 작품은 철학적이며 신학적 테마를 취금한 것이 아니면 역사적인 것이다. 혹은 다른 테마를 취급함에 있어서도 마침내는 종교적인 드라마에로 연결시켜져 있는데 그의 문학의 복차원성(複次元性)이 있다. 그의 종교적 형성(形成)에 있어서의 과정이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음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그는 그리스도교들의 분열을 지양시키는 일치(一致)의 다리가 될 배경(裵景)을 일신(一身)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곧 어릴때 그의 어머니부터 받은 깊은 경건성(敬虔性)과 <하이델벨크>시대에 감수된 사상인 <에론스트 드뢸취>(宗敎哲學者)의 문학비관론적(文學悲觀論的) 신교(新敎)의 종교성을 극복하고 「가톨릭씨즘」에로 귀향(歸向)하여 어머니인 교회의 품안으로 돌아와 그의문학적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갔기 때문이다.
1876년 10월 11일 「웨스트팔리아」주 「민덴」에서 난 이 시인은 현재 「뮨헨」근교 「콘랏회」성의 고적(孤寂)에서 아직 청춘과 같은 피로를 모르는 창작을 계속하고 있다. 잠시동안의 「쉬쓰」피난을 예외(例外)하고는 그가 12년동안의 나치스의 멸시와 연금(軟禁) 속에 반거(反拒)를 감행한 곳도 여기다.
대전후 1947년 독일의 유일의 작가로서 국제 「펜클럽」에 초청받았으며 같은해 「뮨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1948년 <라인홀트 쉬나어더>(1958년에 작고한 가톨릭시인)와 함께 「드로스테 휄스홒흐」상 수상으로 다시 문학계에 떠올랐다. 이 모든 영예에 앞서는 것은 해를 거듭함에 따라 그에 대한 참고(_高)하는 인식(認識)이였으며 더구나 외국문단으로부터의 평가는 그의 세계적문명(世界的文名)을 확립시켰다. 그중 프랑스의 <클로델>이나 <베르나노스>는 찬탄(讚嘆)을 아끼지 않았으며 <베르나노스>는 <폰 러 포르>의 「首台下의 最後의 女子」를 번안(飜案) 각색(脚色)해서 1947년에 「쉬이스」에서 초연(初演)까지 시킴으로 그에 대한 경애(敬愛)를 표시했다.
그의 본격적 문학활동(本格的文學活動)은 1924년 발표한 「교회에 드리는 찬가」로 시작된다. 그후 2년 사이에 그는 은사(恩師) 「트뢸취」의 저작의 간행을 준비해 주었으나 이것은 또 은사와 그의 종교와의 몌별(袂別)을 뜻하고 청산하는시기였다. 1926년 드디어 그는 자모인 가톨릭교회에 귀정(歸正)했다. 이 찬가(讚歌)와 1932년에 부른 「도이췰란트에 드리는 찬가」는 구약시편(舊約詩篇)을 연상시키는 그의 이매지의 비할 수 없는 풍부성과 오직 찬가에 호흡하는 넑들만이 그를 딸아갈 수 있는 풍토(風土)를 엿보게 한다.
현대 독일문학의 최고봉의 하나인 <폰 러 포르>(토마스만이나 릴케는 그 비(比)가 아니다)의 명성의 원인을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작품구성(作品構成)의 엄격성(嚴格性)에 들린다. 그의 소설은 소박(素朴)하며 때로는 매우 남성적 거치른 표현으로써 심장(深長)한 뜻과 상징(象徵)을 내포(內包)시키며 빈틈없이 정연하게 건축(建築)되어 있다. 「바다의 審判」이나 「무죄한 아이들」은 좋은 예일것이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이 마지막 몇페이지에 전체의 「클라이막스」라기보다 얘기와 사건의 해결의 관건(關鍵)이 보여져 있다.
그러면 <폰 러 포르> 문학의 일회성(一回性)과 그의 결정적 계기(決定的 契機)는 무엇이냐. 그것은 그의 문학(文學)은 모든 작품이 목표삼고 지향하고 있는 창조의 질서에 확고히 기반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모든 운명 안에 <폰 러 포르>는 창조주의 간섭과 통어(統禦)를 보고있다. 많은 현대인이 꺼리는 은총(恩寵)은 그에게는 너무나 뚜렷한 현실인 것이다. (계속)
金泰寬(筆者 예수會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