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토>정권의 연금생활 중에 서거한 <알로이시오 스테피나쓰> 추기경의 장례는 그의 출생촌인 「크라시스」에서 거행될 것이라는 결정이 번복되어 생시에는 비었던 그의 주교좌성당인 「자그렙」대성당에서 거행되어 「유고슬라비아」정부 고관들도 참예하였는데 이 일은 사실상 순교(殉敎)한 추기경을 국민들이 『순교자』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공산당의 노력이었다.
대성당 안에 안치된 그의 유해(遺骸) 옆을 지나간 조객(吊客)의 수가 10만명 이상이었으며 조상하는 군중이 늘어선 여러동네를 천천히 지나는 네대 차의 행렬로 운상되어 「자그렙」대성당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검은 상복을 입은 농민들 그들 가운데는 고 추기경께 마지막 고별을 드리려고 100마일을 걸러온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영구차를 둘러싼 100명의 신학생 의장대의 주위에 가까이 밀려들었다. 「자그렙」교구장으로 임명되었던 <세페르> 대주교가 집전하는 연미사에 1천명이 참예하였고 대다수는 이 16세기에 건립된 대성당 밖에서 비를 맞고 서있었다.
자동차 충돌로 부상한 교황특사(特使) <쾌닛히> 추기경이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말미암아 미사시간은 한시간반이나 연기되었다. 몇명의 사복(私服)경관들이 감시하고는 있었으나 경찰의 경계는 그다지 심하지는 아니했는데 주교가 15위 신부가 5백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간소한 철관(鐵棺) 속에는 고인이 평소에 뫼시던 성모상과 성<스테판>상(像)이 들어있었으며 묘지로 운구할 때 몇몇 부인들이 『스테피나쓰님께 영광』이라고 소리를 질었으나 당장에 제지 당하였다.
그가 체포당한 이래 사용못했던 그의 주교좌(座)는 검은 보로 덮이었고 그 위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세페으> 대주교는 강론중에 『그분은 인간의 양심과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굳건히 진심 갈력하였다. 그는 고난 중에 자기 위대성을 더욱 나타내셨는데 그분의 말년은 더욱 많은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고 말하였다.
<스테피나쓰> 추기경의 홍관(紅冠)은 전통대로 그의 묘소에 걸리지 아니하였는데 고인은 그것을 받으러 「로마」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