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典禮)상으로 보면 봉재 사십일의 극기정신(克己精神)도 점차적으로 깊이 들어감을 알 수 있다. 장림시기에 구세주의 오심을 바라고 점차적으로 고대하다가 영성적(靈性的) 태양이 솟아 오르는 것과 같이 봉재사십일도 처음에는 칠순, 육순, 오순 주일로 봉재 사십일을 준비하고 그 다음에는 통회보속을 격려하는 사십일이 시작되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시기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 머리에 재(灰)를 받고 우리가 재로 갈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아 너는 먼지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 아무도 여기에 항거할 사람은 없다. 제왕도 장군도 학자도 거지고…
죽음은 슬픈 일이며 절망적인 것이라 고통과 환난은 싫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만이 이 슬픔을 희망과 즐거움으로이 고통과 재난을 기쁨과 영광으로 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철현의 글을 다 읽어도 모든 도서관을 다 헤메도 죽음과 고통을 희망과 기쁨으로 변화시킨다는 약속을 드룰수가 없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四十일을 넘재하신 것이다. 교회에서는 우리에게 대재와 소재를 명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현대에서 받는 정신 고통 질병 가난 궁핍 이런 고생을 피해야 할망정 고통을 더 받겠다는 것은 웬 어리석은 짓이냐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답해야 할 것이다.
재와 보속은 우리 선행의 목적과 희망이 아니라 성총과 승리를 얻는 방도와 방편이라고, 「스토아」철학자나 불교도(佛敎徒)와 같이 뜨거운 것이나 찬 것이나 구별 없는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니다. 쓴 것과 단 것을 구별없이 삼키고도 태연한 대리석 인간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더러운 흙탕 속에 뿌리를 박은 연(蓮)뿌리가 수면에는 하늘을 향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이 제와 보속이 우리에게 괴로운 것일지라도 그것은 승리와 부활을 낳는 기적을 우리에게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현재에 사는 우리와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였다. 주께서 4십일 재를 지키시고 힘있게 처 이기신 유혹은 우리가 받는 유혹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먼저 굶주리신 그리스도께 먹을 것만을 생각하는 동물적 유혹을 악마는 보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빵으로만 살지 않고 오직 천주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다. 또 악마는 높은 성전에서 뛰어나려 많은 찬송과 갈채를 받는 허영으로 예수를 유혹하였다. 이런 허영도 예수께서는 또 물리치시고 또 우리를 쉴새없이 괴롭히는 물욕도 「만모니즘」도 다 처이기셨다. 우리도 이런 유혹을 그리스도와 같이 처이겨야 할 것이나 그러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재를 지킴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보속과 고신극기는 적은 것이다. 또 변변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확대(擴大) 시키는 방법이 있다. 우리의 기도를 항상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임하야 하소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기도와 재와 고신극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비결이다.
林和吉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