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作家論(작가론)] 獨逸(독일)의 神秘作家(신비작가) 詩人(시인) 게르투르트 폰 러 포르 女史(여사) (完)
발행일1960-03-06 [제219호, 3면]
【承前】그가 취급하는 문제는 현세대의 정신적 고민(苦悶)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문제가 역사적 사실과 얼켜져 등장될 때도 현대의 인류의 고뇌(苦惱)에 대한 동정을 갖고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그 호예(好例)는 「악테붉의 혼례(婚禮)」 「교수대하(絞首臺下)의 최후(最後)의 여인(女人)」 혹은 「유대인 구출신(區出身)의 교황(敎皇)」이다. 더구나 1954년에 발표(發表)된 「천국(天國)의 문(門)」은 중세기의 과학과 종교재판 문제를 현대의 원자전(原子戰)에 연결(連結)시켜 교회가 현대인(現代人)의 신앙에 부치는 경고를 대변하고 있다.
그의 주요한 생각은 역사 그 자체는 비록 혼란과 착오(錯誤)를 저질을지언정 인간의 그윽한 마음가지 예속시키고 있는 신(神)의 구속계획(救贖計劃)의 위대한 질서안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적 2부작인 소설 「베로니카의 땀수건」의 「로마의 샘물」(제1부)와 그 속편인 「천사들의 관(冠)」에서는 사랑이란 것은 그 차제 구속의 의의(意義)와 힘을 가졌는 것이며 사랑이 미신자(未信者)까지라도 성사(聖事)의 실효범위(實效範圍)안에 포섭(包攝)시킬 수 있다는 대담한 테마가 전개되어 한 때 신학자 「써어클」에 물의(物議)를 이르키기까지 했다.
이 시인과 그 소설의 인물들의 근본 태도는 신적섭리배정(神的攝理配定)을 듣는 인간의 겸손한 마음의 준비이다. 이 태도를 <폰 러 포르>는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비할 수 없이 보다 순수하게 구체화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남성은 모든 역사적 사건의 십자로(十字路)에서나 전투적인 폭력과 쉴새없는 활동에 있어서 피조물인 인간의 근본적 태도인 수동(受動) 이것은 바로 종교적인 것)의 태도를 망각하고 창조신(創造神)의 속삭이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 「영원의 여성」에 이 시상이 결정되어 있으나 이 책은 이 나라의 비(非)여성적 「여성운동자」들, 중성적 여류명사들의 필독할 것이겠다. 「어린이의 나라」에서 <글리스무다>는 어떤때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네들은 언제든지 사내들만의 첫째간다고 생각하고들 있지만 실은 제일 꽁무니에 있다오 제일 첫째는 천지창조인데 이것은 천주의 영광이오 그 다음 오는 것은 여인의 겸손인 수태이며 그뒤에 비로소 오는 것이 행동인데 이것은 남자의 폭력이오』 여인의 손에 천주의 광영(光榮)이 앞선다는 이 사상은 <폰 러 포르>의 모든 작품을 이끌어가는 「라이트모티브」이다. 이것을 언젠가 그는 인간고(人間苦)의 심연(深淵)에까지 비취는 『신의 환희(歡喜)의 시(詩)】이라고 불렀다. 「바르비의 동정녀(童貞女)의 탈혼(脫魂)」이란 단편(短篇)에서 이 수녀는 말한다. 『천주는 항상 영혼에게 황홀한 행복으로 머무러 계십니다. 비록 그에게서 사라져 버린다 드래도』
희생이라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이 남을 위해서 대신 억울하게 받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악마적인 세력에 대한 가장 견고한 요새(要塞)가 되는 것이다. <폰 러 포르>가 <그레암 그린> 같은 작가의 죄의 신비주의(神秘主義)와 구별되는 것은 바로 여기다. <폰 러 포르>는 악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죄악을 다룰때는 악 그자체 때문에 그 신비를 그려서 불가피하게 혹은 일반적으로 은총(恩寵)의 「쇽크」로써 해결지워버리기 위해서 화지 않는다. 선의 실재(實在)는 성(聖)된 정상성(定常性)에서 체험되는 것이며 이것만으로써 악을 쫓아내는데 충분한 것이다. 『마(魔=Demonie)는 결코 마로써 깨뜨리지 못한다.』
이 시인의 사상의 또 하나의 봉우리는 그것은 사랑의 신비이다.
자연적 사랑과 초자연의 사랑은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이란 것은 신적(神的)인 것이다. 이 사랑의 신비는 그리스도교의 「테에제」이다. 그 원천(源泉)은 성자(聖子)의 강신적 수육적(降身的 受肉的) 사랑이 우리를 사랑한 첫 사랑이다. 너무나 인간적 비록 타라된 사랑이라도 그것이 정화(淨化)의 고통을 통해서이나마 드디어는 신에 대한 초자연(超自然)의 사랑에로 연결(連結)된다는 「테마」는 진정한 문학(文學)으로써 성립(聖立)된다. <그래암 그린>의 「정사(情事)」에서 우리는 본 바 있었으나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문학이라기보다 우수한 문학이다. <폰 러 포르>의 중편소설 「사랑은 한계를 넘어서」(plus ultra - 한국역은 「사랑은 아낌없이」라고 일본역에서 중역(重譯)이 나왔다)에서는 한 궁녀(宮女)의 황제(皇帝)에 대한 열열한 짝사랑이 기구한 역사적 사건에 얼켜져 드디어 신적 사랑에 이끌어 나가며 여기에 지상적(地上的) 황제에 대한 사랑이 포섭(包攝)되어가는 과정이 그와 평행되어 섭정(攝政) 마마의 망부(亡夫)에 대한 사랑의 영원성(永遠性)과 초자연성에 반주되어 묘사(描寫)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우수한 역사소설인 동시에 신비주의적 오묘(奧妙)한 상징소설(象徵小說)이다.
이 시인의 문학에서는 그렇다고 추상적개념(抽象的槪念)과 냉냉(冷冷)한 무미(無味)한 인식이 그의 작품과 인물의 세계를 지배하며 그의 문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피끓는 인간이며 따뜻한 현실에 약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걸려있지 않으며 도저히 빠져나오지 못할만치 운명(運命)의 그물 안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 위에는 영원한 예지(叡智)와 자애가 지배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헤메며 타락하였다 할지라도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의 광채(光彩)안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세계상(世界像)의 전체성(全體性)과 순결성(純潔性) 앞에서 허무주의(虛無主義)는 붕괴(崩壞)되고 만다. 「천사(天使)들의 관(冠)」에서 한 소녀의 미신자인 약혼자 <엔찌오> 안에 제1차대전 후의 사상적 혼란에 스며든 허무주의가 극복되어 나가는 것은 이 축소도라고 할만하다.
현금 한국의 문학이 퇴폐적인 실존주의나 <카프카>의 불가지론적세계(不可知論的世界)나 문제삼을 것도 못되는 자유향락주의(自由享樂主義) 사이에서 헤매며 갈팡질팡하는 혼돈(混沌)문학은 깊고 그러나 넓은 인간성(人間性) 안에 있는 영원한 것을 지시하는 기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