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忠武(충무)(統營(통영))
아늑한 로맨틱한 고장
충렬의 얼 물려주는 학교가 있고
절 같은 성당에는 『자개 제대』가 유명
발행일1960-03-06 [제219호, 4면]
경남의 옛도시 진주(晉州)를 거쳐 세시간도 더 걸리는 들길, 산길, 바다가를 털털거려 다다른 곳이 충무(忠武)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가 새롭다.
파아란 바다를 끼고돌아 추자향기 그윽한 통영(統營) 땅은 언제 보아도 아늑한 로멘틱한 고장.
충무공(忠武公)의 충절(忠節)이 서린 곳이 바로 여기거니 생각할 때 선열(先烈)을 눈앞에 뫼시는 듯 옷깃이 바로잡혀 진다.
지나가는 학생을 붙들고 『천주교회가 어디냐고』 물으니 첫마디로 『천주교회는 경찰서 앞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크게 십자 써 붙인 집이 보일겝니다』라는 것이다.
항구의 외줄기 길이라고는 하지만 천주교회가 지방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반가웁다. 과연 얼마를 더 걷지 않아 일본식의 절집 법당(法堂) 용마루 끝에 십자가가 서고 대문짝 같은 글씨가 눈이 끌리도록 쓰여져 있다.
주인을 찾자 <마지아> 박(朴東俊) 신부는 뜻밖인 내방(來訪)에 『웬 일이냐』고 연거퍼 물이며 사뭇 반가워 어쩔줄을 모르는 것이다. 평소에 얼마나 고적했기에 보잘것 없는 내객(來客)에 이처럼 반색을 짓는가를 생각할 때 일선의 사제들을 자주 찾아 뵈오리라는 생각이 굳어져 간다.
1929년 이래 본당(本堂)인 이곳은 제6대째 주임으로 <마지아> 박신부를 맞아 1947년에 태평동(太平洞)에 현 소재로 이전하여 1,200명의 신자를 거느리는 한편 「성모유치원」을 비롯하여 「충렬여중」 등 교육 시설을 갖고 있다. 『작년 가을 태풍우의 피해는 이미 옛이야기로 되었지만 또 제2잔계의 공사를 했다고 들리기에 잠깐 들린 것이』란 인사에 신부님은 몹시도 만족의 빛을 감추지 못한다.
종이장 한장으로 임지(任地)가 결정되어 보내져 와서는 일을 도와줄 사람도 별로 없이 정말로 독불장군격으로 구령사업에 종사하는 사제들의 생활을 볼 때 평신사도직(平信使徒職)의 각긴성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주인과 느그네는 성당 안을 돌아 본다. 자연색 원목(原木)의 아름드리 둥근 기둥과 재목들이 칠을 아니해서 더욱 값졌으며 금빛이 찬란한 연꽃 색임의 장식등 법당의 냄새가 그대로 남아있긴 하지만 불상(佛像)이 않았던 자리에 천년이 넘는 우리 자개문화의 솜씨로 포도송이와 그 넝쿨과 밀이삭을 올려놓은 『자개제대』(齊台)가 놓여져 있어 여기가 진리요 생명이요 길인 천주 계시는 궁전이 되어 기도하는 곳 은총의 전당(殿堂)이 되기에 이른 금석지감(今昔之感)에 깊이 잡기게 한다.
바로 성당 뒷편이 『충렬(忠烈)여자중학교』로서 여황산(餘艎山=一名北山) 중허리인 바로 세병관(洗兵舘) 옆이다.
한반도에서는 제일 따뜻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겨울에도 달걀이 인다(孵化)고 전해지고 있어 따뜻하고 양지바름을 알 수 있다.
남망산을 굽어 보며 멀리 한산(閑山)섬을 내다 보는 한국팔경(八景)의 하나인 한려수도(閑麗水道)가 한폭의 그림같이 전개되어 다시없는 관광지로 꼽힌다.
본시 재단법인 충렬사(忠烈祠)의 경영이던 이 학교는 재단측의 재정난으로 난관에서 허덕이던 중 마침내 지방유지의 권고로 1957년에 가톨릭이 이를 인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인데 재작년에 2층 7교실을 짓고 다시 3층 6교실을 증축중에 있어 학년말까지늰 준공될 것이라 하니 6학급 운영에는 헝그러울 것이다.
전망(展望)을 물으매 『역사 짧은 학원에서 큰소리 칠 것은 없으나 먼저 내용충실로 권위를 세우기에 힘쓸 것이라』고 말하는 교장신부님은 우수한 학생들이 교회로 향해지고 있음에 수고의 보람과 위로를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