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3월달은 기나긴 겨울의 얼음이 녹고 자연계에는 따뜻한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때이며 천주의 백성을 다스릴 사제(司祭)들의 신품(神品)에 올림받는 때이기에 우리는 이 글을 우리의 기구와 정성으로 그대에게 바치는 바입니다.
위에 말씀드린 자연의 순서대로 님의 시련(試鍊)과 수련(修練) 끝에 사제의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축하하며 기리기리 천주의 강복이 더욱 풍부히 내리며 성총안에 성장(成長)하시기 기도드립니다.
무릇 사제직(司祭職)은 구약(舊約)시대부터 신약(新約)의 교회의 생명기능 안에 확립(確立)되어 왔던 것입니다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리스도의 무한한 대사제직(大司祭職)의 각단면(各斷面)이 요청되는 현실을 채우는 것은 사제 하나하나의 사명일 것입니다. 여기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hic et nunc) 교우들과 함께 대확인(再確認)하고 싶은 사제의 상(像)의 몇 측면(側面)에 각광(脚光)을 띄어보며 님의 앞길을 축복하는 바입니다.
한국에서는 신부(神父)님을 자타(自他)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격리시키는 것 같습니다. 영혼을 다스림에 있어 서구(西歐)에서는 고해소에서도 신부는 성 <바오로>의 말씀같이 자기도 죄와 약점(弱点)을 갖고 백성들의 죄과(罪過)를 지는 자로서 대함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맡은 사명을 다함에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사제직은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된다』는 지극히 곤난한 양극(兩極)을 내포(內包)하고 간단없이 그 긴장에 놓인 경계선상(境界線上)에서 전진한다는 것을 인식해야겠읍니다. 님의 받으신 성직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님은 겸손해야 됩니다. 비록 교황이 될지라도 왕족(王族)의 출신같이 고귀해야 되지만 단순하고 꾸밈없기는 농가(農家)의 머슴살이 같아야 합니다. 왕국의 혈통(血統)은 바로 그리스도의 성체(聖體)를 이루며 그의 생명을 관리(管理)학소 분배(分配)하는 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사에 봉사함은 님의 천직입니다. 문화인(文化人)이 되려거나 학교(學校) 경영을 잘하는 것은 그후에 따르는 것이며 때로는 성사를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사(聖事)를 이루는 자로서 님은 자기성화(聖化)에 노력할 것입니다. 천주와 백성 사이에 놓여 중개자(仲介者)로서 있자면 백성들로부터 분리된 자며 님은 고독할 것입니다. 두려워하거니 쓸쓰라게 여길 것 없이 천주와의 이 고독에서 님은 님의 성직을 수행할 수 있읍니다. 고독은 기구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생명의 샘을 죄인에게 님 자신과 신자에게 열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님은 세속의 것이 나니나 세속에 있고 세속의 아이들을 이해하는 아량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이 사랑은 애덕(愛德)이며 가장 세속적인 사랑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자기 생명으로 보이게 사랑하셨읍니다. 영적(靈的)으로만 사랑한다는 것이 때로는 위선적(僞善的)이 될 수도 있읍니다.
님은 부디 한국에 있는 비참한 난민들의 현실에 눈을 가리우지 말으십시요. 그리싀도는 가장 가난한 자들의 벗이었읍니다. 한국의 빈부(貧富)의 극심한 차이는 외국인들을 놀라게 하고 있읍니다. 가난한 이들을 사업으로서가 아니라도 구체적으롣 ㅗ와주는 애덕의 자비의 행위는 수녀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닙니다. 님의 방에 있는 기물(器物) 소지품을 미사성제의 기물에 비해 보시면 좋겠읍니다. 그리고 또 현대 「프랑스」의 대중(大衆)이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나가 재(再) 그리스도 교화가 필요하게된 직접의 원인은 19세기의 성직계급의 사치에 있었다는 사실도 상기(想起)코 싶습니다. <샤를르 더 푸꼬> 신부의 전기(傳記)를 읽으면 우리는 오막집에들 살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 저런 굉장한 건물의 성당이 필요할가 싶어지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회적 변천이 격심하며 현대적 해결이 요청되는 우리의 환경은 또 사제에게 영적인 변별(辨別)을 위한 성신이 은총을 필요케 합니다. 그와 동시에 교회의 사회적 학설과 사랑을 연구하며, 신선(新鮮)한 지식의 흡수와 함양을 등한히 하지 말것입니다. 싲가(識者)는 한국의 교회가 사회적 영향력에 있어서 극동(極東)에서 비교적 열등하다는 사실은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가를 짐작할 것입니다. 권위(權威)를 갖고 무지(無知)하면 억지가 행세하게 됩니다.
사제는 스승입니다. 구원(久遠)의 진리를 현실에로 번역하는 님은 신학(神學)을 일상어(日常語)로써 가르쳐주셔야 합니다. 본당신부로서 님은 교우들의 영적 지도와 성사를 줌에 주력하시되 집 짓는데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으소서. 또 님은 어려운 신학교의 과정을 마치고 많은 시련을 겪으셨읍니다. 님이 받으신 교육에 있어서 혹시나 비이성적인 취급을 받은 일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교우들이나 후배를 그렇게 다루는 것은 한 희화(戱畵)의 재료가 될 수 있읍니다. 바로 사제를 비웃은 <니이체>는 이렇게 말했읍니다. 『그들(사제들) 중 많은 자들은 너무나 고통을 많이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남에게 고통을 주려한다』 끝으로 우리는 어떤 선비와 함께 세가지 희망을 말씀 드리고 주의 강복을 빌겠읍니다.
좋은 것 잘 자시고 잠 많이 주무시고 상사를 잘 주십시요.
도미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