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75회의 탄신을 맞이했을때 「과르디니」는 고요한 「뮌닛히」교외에 있는 자기 서재로 돌아와 있었다. 그곳이 전독일 지성인들의 중심인바 프로테스탄트들에게도 똑같이 매력있는 곳이다. 붉은 우단을 배경으로 놓인 성모상이 서있고 레코드의 수집이 있고 신학으로부터 영화에 걸친 수천권의 서적이 그 방의 전 모습이며 그 안에서 40년간 계속중인 「단테」 연구의 대작이 완성중에 있다. 신경통으로 입원했던 그는 5월 신학기부터 「뮌닛히」대학에서 강의를 재개할 것이며 올봄부터는 「루드비그」성당에서 설교도 할 것이다. 그의 추정자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루네쌍스 휴마니스트처럼 모든 일의 열쇠를 가진 것 같다. 원자학 이야기를 하면 현대물리학을 다 아는 것 같고 「후로이드」를 깊은데까지 파들어가기도 하고 공산주의 변증론의 장단을 세세히 설명한다. <흴데를린>과 <릴케>의 난삽(難澁)한 시에 새로운 해석을 준다. 그는 예술, 문학, 철학으로부터 종교에 이르는 다리를 마음대로 걸치는 것 같다.』 그는 1912년에 신품을 받았고 또 3년 후에 신학박사가 되었다. 1918년의 처녀출판 「전례의 정신」에서 그는 『천주님 앞에서 경기를 하고 예술작품을 연출하는 것. 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있기- 이것을 전례의 가장 깊은 뜻』이라고 말했다. 「베르린」대학에서 그리그도교철학교수이던 20대 시절에 그는 연출가, 지휘자, 권투가와 같이 서로 색다른 사람들을 포함하여 각 분야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빛나는 존재였다. 종전후에 그가 도와서 조직한 가톨릭청년운동은 70만명의 회원을 헤아린다. 그중에서 400명이 그의 지도아래 성주간의 완전침묵피정을 했을적에 『부활주일미사때 우리는 뼈져리게 부활을 느끼고 나서 함께 먹고 마시고 춤췄다. 그랬어도 경솔한데가 없었다. 빈무덤을 발견했을때 종도들이 반드시 느꼈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다 자신있게 깨달았다.』라고들 말했다. 그는 대전중 「히틀러」에게 쫓기어 피신했다가 전후에 출판한 「우리주(主) 」는 영, 불, 이, 서, 화, 희, 일 7개국어로 번역되었다. 1952년에 「비오 12세」 교황이 그를 교황궁정부 고등성직자로 임명하여 철학문제를 독일어로 서로 토론하였다. 2년전에 독일정부가 그에게 「공로」훈장을 증정하였고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그의 감화는 이제 자기 교회의 영역을 멀리 넘었다. 신앙을 잃은 듯이 생각하는 패들에게 그가 신앙을 돌이켜주었다.』고 말하였다. 그 자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앙보다 더 필요한 것을 모른다. 과거 1950년간 우리 사고를 뒤집어 놓은 사상의 원자화에 나는 반작용(反作用)을 해보았을 따름이다. 그러한 법으로 해설함이 완전한 물질주의 세계로나 또는 급진적(急進的)으로 「나치」의 근본사상인 거짓신비사상으로 이끌지 아니한다. 알아야 할 것은 다 오주(吾主)의 말씀으로 계시되었다. 신앙이 자동적 주임이니 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으로부터 만사를 대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