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고향을 찾아서
발행일1960-03-27 [제222호, 2면]
이 글은 「오지리」의 <헐러베르거> 신부가 휴가를 이용하여 교황님의 고향을 찾아갔을 때의 기행문이다.
「베르가모」 읍내를 떠나 50리를 서쪽으로 가면 길목마다 도표(道標)를 새로 해붙였는데, 「솟또 일 몬떼」로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다.
교황 성하의 고향동리다. 알프쓰의 연산(連山)을 바라보는 언덕바지 위에 서있는 이적은 촌락은 지도상에도 나타나 있지 않는 이름없는 산촌이다.
이 동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무슨 아름다운 성당이 있어서도 아니오 또 무슨 명승고적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 이 숨은 산골에 살고 있는 어떤 농부 두 사람 그들의 백씨(伯氏), 이를테면 그들의 큰형님 덕택으로 「세상에도 유명한 사람」들이 되었고 여기가 바로 이 유명한 분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베르가모> 읍내에서 우리들은 요행히 신부님들이 경영하는 큰 교직원기숙사에 유하게 되어 많은 예비지식을 얻었던 것이다. 이 기숙사의 문지기 영감님은 「롱깔리 소년」(교황의 세속이름)과 국민학교에서 한반 동무로 공부했다고 신이 나서 자랑하는 터이라 안내자로서는 참으로 적임자를 구한 셈이다. 더구나 이 영감님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이 산골 농부들의 사투리를 이태리어로 통역까지 해준다.
우리들이 타고간 자동차는 어떤 후생농가 앞에 이르러 정거 했다. 농부의 집 치고는 신식주택에 가까운 편이다. 칠도 새로하고 장식까지 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밭가는 <트락터>가 한 대 놓여있다. 교황의 동생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들에 나가고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국민학교 동창인 우리 통역 영감님이 당장 불러온다고 나갔다.
한 5분후에 『하나 찾았임더』하면서 통역 영감님이 돌아온다. 양 소매를 걷어올린 농부가 물통에다 손을 씻고 있다. 『교황이 동생이오』라고 통역이 우리에게 일러준다. 우리는 『교황의 동생이 손씻는』 아름다운 장면을 카메라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루 40대의 자동차가 한참에 몰려는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지마는 이렇게 되면 농사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하는 그는 『아홉신데 벌써 이렇게 찾아오면 어쩌노』하는 눈치같다.
이때 둘째동생이 들에서 돌아왔다. 그 형님보다 약간 큰 키에 맨발로 다니며 형님과 꼭 같은 노동복 차림이다.
『찬미예수』라고 인사를 한다. 그 다음은 무슨 말을 먼저해야 할 지 망설였지만 생각하면 우리들을 이렇게 연결하는 것이란 오직 하나 교황님 때문이 아니냐.
『언제 로마 다녀오셨읍니까?』 『작년 5월에 다녀왔지요』 『그러면 또 언제쯤 가시겠읍니까?』 『언제 갈지 농사나 지어놓고 봐야지요』 한다.
『혹 형님이 교황이 되셨으면 하는 기대라도 가지셨읍니까?』 『천만에요 교황선거가 하기 두어주일 전에도 형님은 쉬러 왔었는데 그때도 전연 생각해본 일이 없었읍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눈 후 우리를 곧 아랫층에 있어 마당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교황의 방」으로 안내했다.
교황께서 이 방에 거처하신 일은 없으시고 방문객들을 위하여 좋은 의자들을 들여 잘 꾸며놓았을 뿐이다. 벽에는 교황대관식 때의 가족사진 즉 동기(同氣)들과 찍은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 외에도 돌아가신 양친이며 「베르가모」본당에 보좌로 있는 조카신부의 사진들도 있다. 그들은 소박하나마 진정이 어린 즐거움을 몇가지의 선물로 우리들에게 표시했다.
우리들은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알고 싶었으나 이분들이 어쩌나 지독한 사투리를 쓰는지 할 수 없이 그 생질녀에게 알아보기로 했다. 그 여자의 성명을 들으면 이 집은 교황께서 네살 때 이리로 이사해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께서 탄생하신 집은 바로 저 옆집이라고 했다.
『교황께서 휴가차 오셔서 어디서 주무셨읍니까?』 『그럴때면 언제나 저 윗 마을 누님댁에 거처하셨어요. 거기가 훨씬 고요하다고 하시면서』 교황께서는 고요하게 쉬고 가신다는 이야기와 또 「솟또 일몽떼」에서 한 10분쯤 가서 농가를 지니고 살고 있는 다른 형제에 대하여 또 「미라노」에 살고 있으며 오빠가 교황이 되실 때는 손수 순대국거리 순대를 만들어 로마로 팔러 갔다는 교황님의 누이동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마당편 담벼락에 그려놓은 교황의 문장을 사진에 넣기로 했다.
마굿간에 둘러보니 암소 7·8두가 있고 송아지도 그쯤된다. 이태리 농가로는 결코 적은 편이 아니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교황동생 두분의 사진을 찍겠다고 청했더니 맨발로 입은 그대로 포즈를 잡아준다. 생질녀가 맨발을 책하니 간신히 나무신을 신고 나왔다.
이 사진이 세계에 널리 소개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면 혹 옷을 갈아 입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하직을 하고 교황님 탄생한 집을 찾아갔다. 어떤 화가 한 사람이 열심히 그 묵은 집을 그리고 있었다. 또 교황님이 영세를 받으신 성당을 봤는데 한량없이 가난한 성당이었다.
형님이 교황이 되셨으니 로마로 나가서 「고급」으로 생활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니 『우리는 농부로 이렇게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