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은 그 시초부터 보편성과 공교성(公敎性)을 가졌기 때문에 마땅히 전세계 지방과 인종을 초월하여 전파될 것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가서 만민을 가르치라』(마두 28장 20) 하시고 또 『너희는 강림하시는 성신과 덕능을 받아 …… 땅 극변까지 나를 증거하리라』 <종도행전 1장 8>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의 씨가 그리스도께로부터 종도들의 가슴과 당시 『마음이 좋은 사람』 <누까 2장 14> 및 『좋은 땅을 가진 사람』<마두 13장 8>들의 가슴에 뿌려지자 무럭 무럭 자라서 『예루살렘과 온 유데아와 사마리아와 및 땅극변까지』 <종도행전 1장 8> 전파하여 나아갔다. 그 전파는 『겨자씨』<마두 13장 31>와 같아 서서히 이루어졌으나 그러나 세상을 띄우는 『누룩』<마두 13장 33>과 같아서 언젠간 한번은 천주의 나라가 전세계에 오고말 것이었다. 하루 바삐 천주의 나라가 이 세상 및 이 나라에 임하기 위하여 우리는 호교(護敎)를 하고 전교를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전교임무는 그리스도의 천주성을 가르쳐 그 교리를 알아듣게 하고 승복케 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의 『길이 되고 생명이 되고 진리』 <요왕 14장 6>가 되게 하는데 있다. 누구든지 전교사업을 돕는 이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에 참예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사도직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계승이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전교사업에 봉사할 때 그들은 바오로종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수난하심에 결함된 바』<골로세서 1장 24>를 채우는 것이다. 수난의 결함이라 함은 그리스도 수난 그 자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우리 인간으로서 마땅히 채워야 할 것을 채운다는 뜻이다.
가톨릭의 전교사명은 어디까지나 각 사람의 마음에 천주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는 만큼 많은 부분이 영적 나라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어떤 이들은 전교의 열성을 외적 방면에로만 돌리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다. 즉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탄에 빠진 현 사회를 앞에 놓고 다만 인류의 현세적(現世的) 행복만을 위하여 인간적 질서(秩序) 재건에만 전능력을 경주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다하여 여러가지 사회사업을 경영하면서 인류의 현세적 행복을 위하여서도 기여하여야 할 것이나 그러나 영적 방면 즉 신학적 사고(思考)를 버리고 이것만을 한다며는 우리는 미국주의(美國主義=Americanism) 혹 행동주의(行動主義=Activism)라 불리우는 이설(異說)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한가지 예로서 현재 쏘련 및 중공을 위시하여 종교박해의 선풍이 불고 있는 제국가에 있어서 무질서, 증오(憎惡) 압제, 혁명… 등 갖은 암운(暗雲)이 돌고 있는데 이는 바로 천주를 배척하고 잃어버린 곳에는 인간의 현세적 행복에도 큰 손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의 현세 및 후세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전 한국민족에게 전하여야 한다. 즉 우리 신자들의 쌍견(雙肩)에는 한국민족의 물질적 및 도의적 위기(危機)를 구해줄 무거운 책임이 놓여진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구한다는 것은 다만 세상에서 떠드는 어떠한 사상의 체계(體系)로써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천주께로부터 받는 초신성한 신앙과 은혜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초성(超性)한 은혜에 인간의 노력이 하바여 참다운 그리스도교 신앙이 꽃피게 된다. 전교생활에는 성촉과 노력 두가지가 간과 할 수 없는 본질적 요소로서 둘 중에 하나를 부정하여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교에 종사하는 이는 항상 자기가 지도하는 사람들이 천주의 성총을 받도록 주선해 주어야 한다. 다음 전교에 종사하는 이의 노력 여하에 따라 사람들은 쉽게 혹은 어렵게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한민족 대중에게 즐겁게 또한 쉽게 듣겨지도록 유리한 조건을 생각해낼 것이다. 전교의 진보는 전교를 받는 자들에게도 관계가 있지만 대부분이 전교하는 이의 총명과 분발에 달린 것이다. 영혼을 천주께로 전급케하는 자세한 방법, 어느 신자단체에게 형식과 생명을 부여하는 조직법, 일정한 문화환경(文化環境)에 있어종교심의 발현양식(發顯樣式)에 대한 연구……등은 전교사(傳敎師)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들이다. 세계 가톨릭 역사와 그 현상은 전교사들에게 많은 암시를 주는 연구실이 될 것이다.
교회는 문명 혹은 문화와 동의어(同義語)는 아니다. 어떤 문화가 각 개인의 동경 및 사회적 조직의 전체를 그리스도의 교리대로 움직인다면 그 문화 및 문명은 그리스도교적 문화라 칭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문명이라 할지라도 이 칭호를 홀로 점유하여 스스로 유일한 그리스도교적 문명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모든 문명을 초월하여 다른 많은 문명을 활발케 하며 완전케 할 능력을 완전히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문화만이 그리스도교적 문화가 아니라 한국문화도 얼마든지 그리스도교적 문화가 될 수 있다. 천주의 계시가 인류 역사에 시작할 그때부터 이 계시는 필연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일정한 조건(條件) 하에 있게 되었다. 최초의 전교는 희랍 및 로마문명이 성황하던 지방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회는 이 양문화(兩文化)에서 자기교리를 설명하고 예전(禮典)을 조직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계시(啓示)의 본질은 항상 변화없이 엄연하게 전하여 왔다. 그리하여 희랍 및 로마 문명이 그리스도교를 점유한다는 것은 소아병적이오 또한 오류(誤謬)인 것이다. 그것은 천주께 대한 인식은 모든 인류 사회의 최선의 것이라도 무한히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명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모든 것을 자기 품에 포옹하여 각 문화 안에서 교회를 발전시킨다. 즉 그리스도교 복음을 각 민족의 고유(固有)한 문명 안에 그 본교리를 잘 살리면서도 또한 잘 절충시키기 위한 방법을 간구한다. 이것이 가톨릭적 전교이 전통적 사상이다. 이는 이미 외교인의 사도인 성바오로 종도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저는 외교인에서 귀화한 신입 신자들에게 할손(割損)할 것을 적극 반대하였고 또한 어느 지방을 귀화시킨 다음에는 그 지방 사람을 목자로 선정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문명은 부동(不動)한 것이 아니고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과도기(過渡期)에 있는 한국은 그 문화면에 있어 급진(急進)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한국에 있어 우리의 전교를 유효하게 하려면 전교사(傳敎師)들은 발전하는 한국문화와 걸음을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가톨릭의 복음은 누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의 활동을 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의 원칙을 민족 대중에게 주어 전한국 민족의 단체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것이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일치활동이 국가를 위하여 사실로 유익하다는 논거(論據)와 사실을 한국인 일반에게 보여주면 이것은 벌써 좋은 신용장(信用狀)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과거 일제(日帝)때와 달라 많은 미신자들이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갖고 있으니 우리의 일터는 더욱 명랑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좋은 조건에다가 우리는 불변하여 고칠 수 없는 교리를 살리면서도 진리를 인식시키고 사랑케 하는데 시비적 매력을 사용할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호교론(護敎論)도 한국실정에 적응(適應)시킬 필요가 있다. 천주의 많은 계시를 질서있게 설명하여 천주와 인간에 대한 바른 도리를 밝히는데도 여러가지로 좋고 쉬운 표현을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 있어 우리 교리학(敎理學)도 한국 실정에 적응시킬 수 있다. 여기서 한가지 착심할 것은 한국어의 교회용어를 완성하여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오는 것을 적절하게 번역할 것이다. 또한 윤리의 내용은 그 본질에 있어 불변한 것일지라도 여러가지 의무의 배렬, 그 동기(動機)의 설명, 그의 표현, 그의 응용(應用)에 있어서는 우리가 마음대로 적응(適應)시킬 넓은 영역(領域)을 갖고 있다. 종교건축, 종교음악, 교회미술……등에 있어서도 각 민족의 성질과 및 창의에 따라 얼마든지 자유로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 이 분야에 있어 외국인 전교신부들의 일은 한낱 밑 준비에 불과한 것이다. 외국인 전교신부들의 역할은 복음의 밭에 씨를 준비하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그 씨를 그 땅에 익히게 하고 조그마한 손질을 하여 잡초에 파무디지 않게 할 뿐이다. 그러나 한국인 성직자와 전교사들의 책임은 외국인의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즉 가톨릭교회를 한국인 생활에 항구적으로 부리를 박게하여 다만 전교지방을 넓혀 수를 많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를 모든 한국인의 마음 깊이 뿌리박게 하므로 신자들의 질(質)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한말로 전한국을 모든 면에 있어 가톨릭국가로 만드는데 그 임무가 있다. 한편 가톨릭 선조의 불가침성(不可侵性)은 절대적으로 존중할 것이나 그러나 동시에 이 법율은 모든 교리설명이 청중의 능력에 적용하지 안ㅇㅎ으면 안된다는 다른 의무를 규정한다. 듣는 이의 오해(誤解)를 살 위험을 고려치 않고 비록 그 자체로서는 정확한 표현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진리이고 무분별하게 제시하는 것은 결코 진리에 충실한 것도 아니고 또한 애덕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일에든지 순서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나 더욱 천주의 복으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써서 서서히 순차적으로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각 민족의 정신적 능력에 따라 우리의 전교열을 적응시킬 것이다. 이 방법은 기회주의(機會主義)가 아니라 성바오로 종도의 『젖을 먹일 것이지 딱딱한 음식을 줄 것이 아니다』(헤브레아서 5장 12) 하신 말씀을 따르는 것 뿐이다.
이미 환전히 그리스도교화한 구라파 등지에서 시행되는 신심업(信心業)을 가져다 실행하는데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이 신심업에 있어 신입교우나 혹 미신자들의 일으키는 반응(反應)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쓸 것이다. 신심행사를 하는데 있어 항상 한국적 환경과 한국적 기분을 반영시킬 필요가 있다. 가톨릭 예전의 본정신은 갈바리아 산상에서 참으로 이루어졌던 형제를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므로 모든 신자로 하여금 더욱 매력을 느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마련할 것이다. 그리하여 주일과 첨례날은 전교를 위한 영혼의 잔치날이 되어야 한다. 첨례날 예식은 모든 힘을 들여 신자 혹 미신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도록 좋고 아름답게 하여야 한다.
교육 및 사회사업에 관하여는 벌써 우리 한국에도 많은 진보를 보이고 있지만 이에 종사하는 이들은 각자 자기분야에 있어 현재의 실정을 살펴 일진월보(日進月步)하는 과학과 걸음을 같이 하여 적절한 개선을 가하여 효과를 내고 가톨릭의 권위를 확보(確保)할 것이다. 우리의 활동 및 봉사가 좋은 영혼을 위하여 광명의 길이 될 때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세자의 수를 가지고 전교성적을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봉사는 결코 회개하는 이를 위한 투자도 아니오 교회의 좋은 광고도 아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다만 우리 신앙의 큰 계명으로서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하는 계명준수 때문이다. 이 증거를 철저히 신자들에게나 혹 미신자에게 밝혀 주면 전교성적은 그 뒤를 따라올 것이다.
출판사업은 현대 전교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절대로 등한히 할 바가 아니다. 이는 역대(歷代) 교황들의 꾸준한 장려로써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먼저 출판물이 가톨릭적이라고 불려지려면 가톨릭교회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채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나 또한 참으로 한국의 것이 되려면 완전히 한국적이 아니면 안된다. 외국의 가장 우수한 잡지의 단순한 모방(模倣)도 불충분하고 내력(財力)과 종업원의 수적 증가도 이것을 완전케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주위에 어떠한 서적이 읽혀지나? 어찌하여 그것이 읽혀지나? 무엇이 대다수 독자에게 가장 매력적인가? 일반민중심리를 연구하여 다만 신자만을위하여서가 아니라 모든 일반인에게도 읽혀지도록 문학적 및 예술적 표현으로 충실한 사상적 내뇽을 가진 책과 잡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복잡한 전교사업에 있어서 많은 협력이 필요한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무익한 고립(孤立)과 서로 방해가 되는 혼잡을 피하여 서로 융통성이 있는 기초 위에 가가자의 노력을 조정(調整)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와 재력을 생각하여 엄히 정력의 낭비를 피하고 이로 인하여 각자 서로 도웁고 서로 키워서 서로의 운동을 방해치 않고 한국 전체의 통일을 보존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 말한 것은 전교에 있어 몇가지 근본적 방법으로서 이외에도 열이 있는 자는 무수한 방법을 발명하여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쉽게 더욱 빨리 진리를 알아듣게 할 수 있을 줄 믿는다. 성경에 『천주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저 만사를 선으로 유도하신다』(로마서 8장 28) 하였으므로 열심한 전교사의 하는 일은 모두 좋은 전교방법으로 변할 것이다. 이상 열거한 전교원칙과 방법 위에 한국인으로서 외국인의 원조없이 독립할 수 있는 가톨릭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는 열심한 신부, 회장 전도사를 쇄신분골 하는 분투와 끊임없는 용기없이는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저들에게 억울한 비난과 방해가 닥쳐올 것이다. 그러나 자기로서 할 바를 주(主)의 성의대로 다하였으면 하늘과 땅 위에서 무서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후대인들은 저들의 분투와 노력이 한국 가톨릭의 초석(礎石)이 될 것을 사실 그대로 기억할 것이다. 낙심될 때나 혹 어려울 때에는 이 땅에서 피를 흘려 이땅을 걸게 마련하신 79위 순교복자들과 그외에 숨은 치명자들의 전달을 빌 것이다.
朴養雲 神父(筆者·神父·聖神中高校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