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제220호)에 보도한 바 있는 7명의 새 추기경 친임(親任)은 3월 28일의 비밀추기경회의에서 정식으로 임명을 받고 30일의 반공개(半公開) 석상에서 붉은 각모(레드 비레따)를 받고 31일 공개 석상에서 홍관(紅冠)을 받는 순서를 거쳐
교회의 최고 명예직인 추기경으로 친임되었는데 특히 작년 12월 4일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마렐라」 추기경은 전통에 따라 그의 교황대사 임지인 「파리」에서 「프랑스」 대통령의 손으로 붉은 각모(角帽)를 받았지만 이번에 함께 참석하여 홍관(紅冠)을 받았다.
그리고 또 『홍의재상』(紅衣宰相)이라고도 불리우는 추기경이 되면 「로마」에 그 명의의 성당을 갖게 되는데 현재 「로마」에는 75위에 대한 명의교구밖에 없으므로 이번에 새로 임명된 7위를 포함한 10위에 대하여는 고대의 교구를 선정하여 첨가했다.
<새 추기경들의 푸로필>
□ 로우리안 루감봐 추기경
「루타도」의 주교 47세. 그는 「탕강이카」국 「바하야」족의 역대 추장의 가문으로 8세때에 양친을 따라 영세하였다. 1943년에 신품을 받고 「루뱌」본당에서 5년간 보좌신부로 복무하다가 「로마」의 「그레고리」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였다.
1951년에 새로 설정된 「루타도」교구의 초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아프리카」 방인주교 25명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젊은 동시에 가장 활동적인 주교이었다. 그는 추기원에 참여하는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이다. 정의(正義)와 독립을 달성코자 투쟁하는 대륙의 대표자로서 의의가 깊다. 1,515,043명의 신자가 있는 「탕강이카」는 명년에 완전 독립을 획득할 것이다.
현재 UN의 신탁통치국으로서 영국의 관리 아래 있으나 독립후의 초대수상으로 가톨릭신자인 <율리우스 너레레>씨가 유망하다. 그는 일찌기 우수한 신자들을 선발하여 훈련하기 위하여 <성아오스딩> 회전국연맹을 조직하였다. 이나라의 독립에 기여한 인사들이 거개가 이 회의 출신들이다. 그의 친우인 「로마」의 『신언회』원 <프란시스 로쎈바움> 신부는 『그는 조용한 타이프로서 얌전하면서도 항심있는 정력가였다』라고 회상하였다. 또 그는 불과 40「센트」의 택시값을 아껴서 전교사업에 보태쓸만큼 만사에 있어서 헛된 일이 없다고 한다.
□ 루피노 J. 산토스
「마닐라」의 대주교 51세. 「필립핀」군도의 「가가」촌 출신으로 1953년 이래 3백80만 신자를 거느리는 「마닐라」교구의 대주교인 만큼 그의 승진은 놀랄 것이 없다. 그는 지난 태평양전쟁중에 협력을 안한다는 트집으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해방까지 1년간 투옥되었고 종전후에는 빨갱이 유격대의 저격 목표가 되었다.
그는 부인복(婦人服)의 개량을 여러번 호소하였고 성직자들과 가톨릭 악숀 단체들의 정치간여를 엄금하였고 반(反) 가톨릭 서적을 읽지말기를 명하여 그의 명령은 학교에서 의무로 읽히는 교과서의 내용에 관하여 그 나라의 입법부에 반영되었다.
□ 베드루 도이다쯔오
일본 「도오꾜」의 대주교. 1938년 이래 「일본」의 수도좌주교이며 1892년에 「센다이」에서 출생하여 두 살때에 양친을 따라서 영세하엿다. 그는 「로마」의 「울바노」대학을 졸업하고 1921년에 신품을 받았고 12년간 본당을 보살폈다. 1933년에 주일교황사절이 비서가 되었다가 1938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
교황직속 성경위원회의 수석고문인 그는 학술서적 출판에 대한 공헌이 크며 「화란」의 평신도 운동인 「빡스 크리스티」의 지도자이다. 그의 추기경 임명은 대공의회 준비를 위하여 유능한 추기경을 보탠 것이다.
□ 베르나르도 알프린크
「우트레히트」의 대주교 59세. 그는 「화란」의 소도시 「니이케르크」에서 탄생하여 1924년에 신품을 받았고 5년간 본당신부로 있다가 1933년에 「우트레히트」대신학교의 성경학 교수로서 학구생활에 들어갓다. 1944년에 교황직속 성경위원회의 고문이 되었고 1945년에 그는 「니이메겐」의 가톨릭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5년전에 「우트레히튼」 대주교이던 <네 용그> 추기경의 뒤를 이었고 화란국 군종(軍宗) 주교를 겸임하고 있다. 지난 3월 3일 「오오스테르베레크」에서 <잔 드퀘이> 수상이 국방회의 중에 <알프링크> 대주교의 승진을 전화를 받고 그 희보를 알리기 위하여 회의를 중단하였다.
1958년에 그가 추기경 임명에서 누락되었을 때 화란의 가톨릭신문(新聞)들의 불만이 대단했었는데 이번에는 1면 전 페이지로 보도할 만큼 기뻐하였다.
□ 요셉 레훠브르
「부르즈」의 대주교. 67세. 그는 1892년에 프랑스의 북부 「뚜루꾕」에서 탄생하여 1921년에 신품을 받았고 1938년에 주교로 축성되어 1943년에 「부르즈」의 주교가 되었다.
가톨릭 잡지 가운데서 오류(誤謬)를 발견했을 때 그는 항상 비판을 주어 바로잡았다. 그가 신품을 받기 전에는 우수한 법학자이었고 「그레고리」대학을 졸업할 때 교황이 내리는 최고우등상인 금메달을 받았다. 또 그는 현 교황께서 주불교황대사시절에 친교가 있었다.
□ 안토니 봇치 추기경
성청분서국장, 73세. 그는 교황이 요인들에게 보내는 문서의 라틴 원문기초의 책임자이다. 예를 들면 1958년에 <비오> 12세 교황의 묘비명을 그가 기초하였다.
<요안> 23세 교황 선거때에는 추기경들의 의무를 그가 라틴어로 기초하고 낭독하였다. 또 그는 현대 『이탈리-라틴』 사전(辭典)을 출판하였다.
이 대학자는 1885년에 「프로렌스」 근방 「지뇰라」에서 탄생하여 1909년에 신품을 받았고 12년간 「프로렌스」신학교의 교장이었다. 그가 현직에 임명되기는 1931년이었다.
□ 루이지 트랄리 이아 추기경
로마교구의 대리주교. 64세. 그는 과거 수년간 사제서품식을 집전하였다. 「로마」교구를 관리하는 직책에 있는 그는 1895년에 「알바노」에서 탄생하여 「그레고리」대학을 거쳐서 19__년 8월 10일에 신품을 받았다.
「울바노」대학에서 사회학과 교리학을 교수하다가 1927년에 포교성성의 서기가 되었다. 1936년에 그는 혼배문제를 판단하는 『로만 로타』의 판사로 임명되었고 1936년에 주교로 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