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서울새남터 福者學校(복자학교)
「집 없는 천사」에게 직업교육
때묻은 얼굴에도 빛나는 눈동자
흙탕 속에 묻힌 영혼들을 찾는 수사님
발행일1960-04-03 [제223호, 4면]
이 사회의 한 모퉁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사회가 있다. 이것은 기형(奇型)적이면서도 보통 인간사회에서 보다도 더 엄격한 규률 아닌 규률이 그 사회의 불문률(不文律)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거처(居處)가 없고 일정한 시각에 유식을 먹을 수는 물론 없으며 마음이 내키는 대로 발길을 아무 곳에나 옮겨 놓는 것이다.
이들을 가리켜 흔히 「거지아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부랑소년(浮浪少年)」이라 하기도 한다. 그들의 몸에는 의복이 제대로 있을리 없고 신발이 신켜져 있을 때를 별로 보지 못하며 또한 하늘은 그들의 천정이며 대지(大地)는 그들의 침상인 것이다.
그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면서도 담배를 피워보기도 하고 깡패와 휩쓸려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입에서는 막을 길 없는 폭언과 악담과 욕설이 쏟아져 나오고 저속한 유행가와 음어(陰語)를 뇌까리기도 하며 오가는 신사 숙녀의 옷자락에 짓굿게 매달리기도 한다.
이들보다 조금 윗또래들은 집이 있으나 가난하여 배움터를 가지지 못하고 악의없는 범ㅈ뵈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은 술집에 드나들고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하고 사창굴로 안내하는 「쇼리」 역할을 한다.
아아 그러나 이들의 속에도 역시 천주께서 주신,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영혼이 있는 것이다! 이 무수한 영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같은 이웃에서 그대로 버림받은 채 남아야만 할 것인가?…
여기는 「새남터」 우리 한국 가톨릭의 순교성지. 이곳에 자리잡고 있는 「복자학교」. 허나 학교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천막(天幕)과 「콘셋트」와 판잣집들로 된 교사(校舍). 그라니 어느 훌륭한 건물로 된 번듯한 학교들에서도 볼 수 없는 더 큰 사랑과 인간의 숭고한 영혼 교육에의 위대한 열성의 흐름이 있다.
비좁은 교실에 학생 수효는 많다. 배움에 굶주린 그들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으며 가르치는 교사(敎師)들의 열성이란 대단한 것이다. 때때로 “삑“ 하고 울리는 기적 소리와 함께 한강(漢江)철교를 요란스럽게 건너오는 열차소리에 수업은 잠시 중단된다. 그래도 학생들의 열심은 조금도 동요되질 않는다. 여기가 바로 그 파묻혀가는 영혼들을 다시 캐내어 그들을 또다시 광명에로 인도하는 위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1957년 10월 15일이 이 학교의 창립날인데 이에 앞선 한달전 즉 그해 9월부터 거룩한 순교지(殉敎地)의 관리를 하기 위하여 「복자수도회」에서는 수사 두 분을 이곳에 파견시켰던 것이다. 그 책임자로 임명된 분이 바로 피어린 노력을 이제까지 계속 해온 <데오도로> 김(金昌浩) 수사였다. 김 수사가 이곳에 와보니ㅣ, 그 주변의 빈민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상태였고 그들은 생활고에 허덕이는 나머지 자녀들의 교육에 대해선 애당초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었다 한다. 그것을 보다못해 천막을 치고 10월 15일부터 이 학교를 시작하여 빈민들의 자녀에게 무료로, 아니 (NCWC에 요청하여) 점심까지 제공하면서 학생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꺼번에 무려 1천5백명이라는 미(未)취학 아동들이 모여왔으므로 손이 부족하여 한때는 아주 혼이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응원자를 얻어 지금은 수사 2명과 수녀 4명이 봉사하고 있으며 헌신적으로 일봐주겠다고 자원하여 나온 대학생 20명이 있어 교사(敎師)진은 강화되었으며 콘셋트도 서고 바락크도 섰다. 그래서 제2단계로 시작한 것이 부랑소년의 교육이었는데 여기에 대한 김 수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소년들은 난폭하고 부지런하지 않았으며 생활에 대하여 거칠었읍니다. 내가 이들을 지도한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의 큰 모험이었읍니다. 이들은 협박, 공갈, 싸움 갖은 나쁜 수단으로 약한 자를 괴롭히고 또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도 않았읍니다. 수도자로서 차마 하지 못할 것이었지만 이들을 지도한다기 보다는 이들 안에 있는 그 영혼의 잠을 깨워 주기 위하여서 나는 폭력으로써 폭력을 대향하지 않을 수 없는때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있었던 것이요 그들도 인간인지라 자기들의 잘못을 눈물로써 호소하였읍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써 용서하고 더욱 더 그들을 천주님의 애덕으로 대할 때 그들은 우리의 감화를 받게되고 약 6개월쯤 지난후 그들은 아주 딴 사람이 되었읍니다. 지금 보시는 바와 같이 모두 근면하고 착실한 소년들이 되어 천주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읍니다. 』
이야기를 듣는 기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었다. 그러나 이 수사들의 사업은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그들의 생계우지를 위하여 직업학교를 세우기로 하여 천안(天安)에다 「복자 농예기술학교」를 세워 그들의 소질(素質)에 맞는 직업을 교육시켜 사회에 내놓는다는 것이다.
「복자수도원」의 계획은 그야말로 원대하여 이들이 새로운 경작(耕作) 재배(栽培)법을 배워 대규모적인 농업을 일으킬 것을 꿈꾸고 있으며 그 첫단계로 제주도(濟州島)에 있는 복자수도원 분원(分院)에서는 금년중으로 「트락타」를 도입하여 농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새남터에서의 사업은 그것뿐이 아니다. 제3단계로는 노동자 부녀자들의 교육이고 다음엔 「새남터 부락」의 건설이다. 이 근방에 있는 빈민들은 이 「복자학교」를 중심으로 일종의 「협동조합」(協同組合) 비슷한 것을 조직하고 지금도 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