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前】 <시그릿드 운셋트>는 확실한 진리의 교회를 찾아 「유럽」으로 여행하였다.
독일(獨逸)을 지나 「로마」에서 잠시 머물었다. 그가 가톨릭교회를 더 잘 알게된 것은 가톨릭교회의 본거(本據)이며 혼(魂)을 간직하고 있는 「로마」에서였다. 그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결코 교회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운 교회라는데 있어서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나는 교회혁신(革新)의 역사를 마치 『가톨리시즘』에 대한 혁명(革命)의 역사로 잘못 알아들었다. 비록 그 개혁이 순수한 의도(意圖)를 가진 열심한 신자들에 의하여 행하여 졌다 하드라도….
흔히 듣는 『가톨리시즘』에 대한 이설(異說)은 널리 보급(普及)된 반교회적(反敎會的)인 선입감(先入感)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결코 큰 감명(感銘)을 주지 못하였다.
그럴수 밖에 없었다. 특히 그 이유레 두 가지가 있다. - 하나는 진리를 가르치는 교회에 의하여 견책(譴責)될 것을 두리는 『푸로테스탄트』들이 자기 편에 유리(有利)한 꿈을 단념(斷念)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느때나 좋지못한 가톨릭신자가 던지는 추문(醜聞)이 있다느 ㄴ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라는 빛나는 교의(敎義)의 이면(裏面)에 나타나는 그림자에 불과(不過)한 것이다』
그때에 그는 『제니』를 출판하였고 또 「앙베르스」에서 세 아이를 거느리고 이혼(離婚)한 화가(畵家)인 <스봐르스탓트>와 결혼하였다. 이어 영국(英國)으로 가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왔으며 그곳에서 딸이 하나 났으나 병약(病弱)하여 얼마후에 죽고 말았다. 모성애(母性愛)는 <시그릿드 운셋트>에게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한 진리(眞理)를 이해하도록 만들었으며 이와같은 글을 쓰게하였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육체적 사실에 불과하나 인간 사회에 있어서는 이 육체적 사실이 여성(女性)으로서는 착한 어머니가 되기보다 더 좋은 일이 없고 그와 반대로 좋지못한 어머니가 되기보다 더 나쁜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언제나 제 자녀(子女)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부모로서의 의미라는 것을 확인(確認)하게 되었다. 우리들에게는 극히 기초적(基礎的)인 진리로밖에 안보이는 문제이다. 그러나 그 당시 여성의 독신생활(家庭없는 生活)을 본보기로 삼던 「스칸디나브」 지방에서는 그와같은 말을 하기 위하여 많은 용기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시그릿드>는 <루커-> 교회에서 견진(堅振)을 받은 후부터 완전히 신앙을 잃고말았다. 그는 「푸로테스탄트」의 각 분파간(各分派間)에 일어나는 붕쇄(崩碎)와 분렬(分裂)에 대한 힘찬 반발(反撥)을 나타내고 있는 속인적인 종교를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학자의 딸인 그는 모든 과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매우 관심이 컸다. 1919년에 발표된 한 기사(記事)를 읽은 그는 모든 결함(缺陷)을 스스로 지적한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칭찬하였다.
『교회는 사람들이 자기 생활에서 실천(實踐)하기를 싫어하면서도 없이는 살지 못함을 깨닫고 있는 불명(不滅)의 사상(思想)을 보존(保存)하고 있다.』 만약 교회의 역사가 <시그릿드 운셋트>를 매혹(魅惑)하였다면 그것은 가톨릭이 모성(母性)과 결혼(結婚)에 관하여 인정하는 그 존엄성(尊嚴性)에 깊이 감명한 까닭이었다. 예컨데 여성의 지위를 높이 올린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그에게 매우 감명적(感銘的)이었다. 『우리들은 사랑과 존경을 바치는 성모 마리아에 관하여 이 지상(地上)에서 형언(形言)할 수 없는 괴로움을 받으셨다는 연민(憐憫)한 생각과 천국(天國)에서 비길 수 없는 자리에 앉아 기쁨을 누리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의 영혼의 눈이 조금씩 밝아짐에 따라 의문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가 가톨릭교회에 들어올 시간이 가까워졌으며 천주의 성총의 도움을 받아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인 것이었다. <계속>
黃敎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