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 23세께서 반포하신 이 기도의향 이면에는 과거 역대교황이 그 회칙(回勅)에서 사제직을 가르치신 바와 같이 만사를 천주님 안에 총집결시킨 한 위대한 성인의 일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이 본당신부는 <요안 비안네> 성인이다.
「아르스」 본당의 이 성인신부는 사람의 영혼을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를 수차 말하면서 『한 본당신부의 직책에서 천주의 심판에까지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대들은 모르고 있다』고 하고 심판 때는 한 신부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든 영혼의 대변자가 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불과 300명 미만의 교우를 맡아있었다. 그가 부임한 곳은 불란서 혁명의 교회탄압의 결과로 정신생활면은 사별되고 그 반면 도덕적 타락만이 윤심했던 시골본당이었다. 이 성인신부 만치 변변히 교육도 받지못하고 또 재주도 없는 신부가 이처럼 험악한 본당을 맡아가는 예도 쉽지 않으리라. 그러던 이 신부가 마침내 십년후에는 이 형편없는 시골을 교화시키고 많은 회두자(改宗者)를 내게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자기생애의 마지막 십년동안은 밤낮을 가지리 않고 밀려오는 순례자들을 맞이하여 하루도 열두시간 내지 열여덟시간씩이나 묵은 고해실을 지키고 있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또 무엇을 말함이었던가. 그는 그 교우들을 돌봄에 있어서 첫째 풍부한 성신의 은혜로 강화되었던 까닭이요 또 둘째로는 성바오로 종도처럼 보(報)함에 있어 세상 지혜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약하고 공포심이 많고 극히 소심한』 태도로 그리스도의 정신의 힘에 의거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코린토전서 2)
그러면 성신의 풍부한 은혜로 강화되기 위하여 모든 사제들은 「아르스」의 본당신부를 본받아야 할 것인가. 적어도 교황의 명령과 또 로마공의회는 성경 도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싶이 성신의 풍부한 은혜를 받는 사제들의 극기 생활의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청빈(淸貧)과 순결과 순명의 길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 바이요 이러한 극기 생활이 곧 성체에 대한 내적 신심과 계속적인 기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비안네> 성인의 평생의 비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성인은 죄인들에 대하여 실로 그리스도의 모상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에게는 극히 가벼운 보속을 주는 대신 나머지 큰 보속은 자기가 다 했던 것이다.
천주님 앞에서 보잘것 없는 것 그리고 동시에 자기 스스로나 다른 사람 앞에서 그 무엇으로 자처하며 값비싸게 보이려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는 희생으로써 성신의 보다 더 풍부한 성총을 바라야만 한다. 이것만 해도 큰 자아 포기다. 오늘날 저 「아르스」의 신부가 했던 것와 같이 부수한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보속하려고 반드시 자기에게 격심한 보속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불필요한 편안한 생활을 단념함으로도 족하다. 어떤 신부라도 교우들을 상대로 접근할 수 없는 통치자적 지위에 자기를 올려놓거나 혹은 세속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생활을 편안하게 하려는 어떤 노력도 성신의 풍부한 은혜를 멀리하는 것이어늘 아직도 많은 사람이 여기에 급급하고 있어서 되겠는가. 교황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우들과 더불어 초자연적인 공동책임을 가져 그들의 죄의 짐을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하기로 흠연히 중계해줄 각오를 가지도록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교우들에게도 기도의향이 재시되어 교우들이 신부를 위하여 기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부를 위하여 옳은 표양을 주도록 그들 자신은 무엇을 해야할 것이냐를 스스로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일을 신부들에게만 미루는 것이 통예처럼 되고 「성인신부」를 바라는 것이 유행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성인신부는 교우들의 참된 기도와 생활에서 나온다는 것은 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