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復活(부활)과 歷史(역사)
발행일1960-04-17 [제225호, 3면]
한국의 하늘 아래서 우리를 그날그날 영위(營爲)의 걱정의 테두리에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할만한 것은 「선거」니 「꽃」놀이니 하는 것보다 외신(外信)에서 들어오는 과학의 성과이기도 하겠다. 우리는 현재 비록 우리가 직접 의식하지 않지만 인류가 돌입하고 있는 원자시대 혹은 우주시대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시대의 아침에 살고 있다.
이 역사의 일획(一劃)에서 자연의 계절이 반복됨에 따라 올해도 우리는 교회의 역년(曆年)에 맞추어 부활첨례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관심권(關心圈)과 인류의 역사와 예수의 부활의 신비에 기계적인 타성으로 관계를 느끼든지 혹은 방관하면서 지나가는 듯하다. 중국의 시(詩)에 이런 의미의 구절이 있었다. 해마다 서로 닮고 비슷한 꽃을 즐기는 사람은 해마다 같지 않다고. 이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상(無常)을 비추고 있다. 무상한 것은 나를 포함한 역사이며 그대안(對岸)에는 영원한 현재가 꽃피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천주의 현존을 감상(鑑賞)만 하고 그치지 못한다. 너무 깊이 천주는 인류안에 자기의 생명의 뿌리를 쳤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의 역사에 있어서 전우주를 죄와 죽음에서 부활시켰다기 보다는 전창조(全創造)를 자기 몸에 취하고 부활 하였으므로 우주와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강신(降神)과 수난은 부활을 위한 것이며 승천(昇天)과 성신강림은 그 귀결(歸結)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역사적인 션실이면서 신비로서 성적(聖籍)으로서 남는다. 그리스도 신자의 하나하나 안에서 그가 세(洗)를 받을 때 그리스도는 자기의 죽음과 부활로써 영혼의 내부에 새로운 생명의 장막을 치고 거기서 신적 생명을 계속하며 풍부히 하며 성신을 통해서 그의 부활한 영화(靈化)된 신체와 같이 광명에로 인도하여 간다. 인류안에서 이 과정은 교회 역년의 리듬으로 진행되어가며 이렇게 역사가 이루어져 간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성탄은 영혼의 역사 안에 새로운 탄생이 되며 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죄와 허무를 정화(淨化) 극복하는 새로운 창조로서 소생케 하는 것이 되며 성신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원동력으로서 인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는 창조의 역사와 합치된다. 구속과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 그 완성은 인간의 타죄(墮罪)로써 중절(中絶)되었으며 천주의 작품은 독성(瀆聖)되었던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인간을 재생(再生)된 창조에로 성화하며 새롭게 하고 창조는 새로운 완성의 단계로 올랐던 것이다. 화석학상(化石學上)의 북경인(北京人)의 발견자이며 고생물(古生物) 학자인 <삐에르 땔라르 데 샤르댕>(Perre Teillard de Chardin) 신부의 위대하나 미완성인 생각에 의하면 인간의 인격을 포함한 우주의 진화의 대완결(大完結)인 「오메가」 점(點)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전우주는 난관을 극복하는 간격을 갖게되는데 이 획기적인 비약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것이다. 부활은 역사안에 단 한번 영원히 섬광적으로 삽입된 초자연적 신적현존(神的現存)의 흐름리아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인류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동화되며 이 신비체가 성장하므로써 역사는 채워져가며 전조물(全造物)은 드디어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 성부(聖父)의 광영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역사의 충만이며 역사의 종결인 것이다. 이 역사라는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이루고 있는 현재를 가장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대의 불안한 인간의 실존의 밑바닥에까지 그의 부활의 서광을 투사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실존주의라는 근대적 인간의 형이상학적 전락의 비극적 자의식(自意識)을 거쳐서 다시 인간의 실존을 지탱시켜 나갈 수 있는 영원의 진리이며 생명 그것이다. 이십세기적 인간의 비극적인 실존이 <니이체>의 「숙명애(宿命愛)」의 영겁 회귀(回歸) 안으로 혹은 <사르트르>의 허무에로 절망적으로 투기(投棄)되려하는 때는 실은 사람은 영원한 천주의 아들의 부활의 새벽에 가까운 더욱더 깊은 밤의 암흑 속에서 있음을 느끼지 않을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