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春川(춘천)교구 遍歷(편력)
왼교구를 휩쓰른 6.25 난리
20년동안 두 차례의 큰 수난
死線(사선)을 넘은 百戰老將(백전노당) <귄란> 주교 뫼시고
발행일1960-04-17 [제225호, 4면]
춘천(春川)교구를 가다.
늦은 봄비가 차창을 후려치는데 경춘(京春)궤도와 평행선을 긋는 소양강(昭陽江)은 갈수록 물결이 거세다. 머지않아 도달될 춘천!
교구설정 스무돐을 맞는 이 교구를 이제야 보려니 생각하매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마침내 춘천! 세차게 내리는 비도 앞길을 가렸거니와 역전의 무질서하게 몰려든 택시, 합승, 뻐스의 잡답상은 신개지임을 보여준다.
오느 교구인들 초창기의 역사가 순탄했으랴마는 이 춘천교구의 20년의 역사는 그 어느 교구에 못지않게 기구하다.
1940년 12월 8일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초대교구장으로 애란(愛蘭) 출신인 성골롬바노선교회원인 <도마스 귄란> (具仁蘭) 신부가 착임하여 그 회원들과 더불어 신천지(新天地)를 개척하은 개척자의 정열을 그체로 기울였으나 불과 2년 남짓하여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교구장을 비롯한 전회원들이 홍천(洪川)에 연금(軟禁)되었고 일부의 지방본당이 군용(軍用)으로 징발당했음을 알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8·15 해방은 한반도(韓半島)를 38선으로 양단(兩斷)한 결과 최전방에 위치하여 간단없이 북한괴뢰의 위협과 침해를 받아온 것이며 6·25의 동란은 전 교구를 휩쓸었고 삼척본당의 <바드리시오 레릴러> 신부는 총살당하고 <안또니오 클리어> 신부는 살해되는 한편 <귄란> 교구장을 비롯하여 다수의 애란출신의 골롬반회원 신부들이 납치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다시 『죽음의 행진』을 강요당했으며 피나는 고초를 겼었음을 알고 있다.
저들이 공산군의 마수를 피하여 탈출하려면 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며 또 그러한 방법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건만 오로지 『착한 목자』로서 그의 양들을 위한 사랑에서 인고(忍苦)의 길을 흔연히 택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깊은 감명에 잠기게 한다. 저들의 피어린 죽음의 행진과 갖난 고초의 억류생활은 저 「갈멜」회의 수녀 <마리 마들렌>이 기술한 『귀양의 노래』가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1953년 7월 27일에 조인(調印)된 휴전협정을 전후하여 북한의 공산지옥에서 존명(存命)한 <귄란< 교구장을 비롯하여 성베네딕트회원 「파리」외방전교회원 등 신부, 수사, 수녀들이 질곡의 생활에서 석방되어 모국(母國)으로 돌아간 것인데 한국가톨릭의 면목이 국내외적으로 동난 이전에 비겨 월등히 능가하고 있음과 「로마」 성청의 깊은 관심은 마침내 1953년 10월 5일에 애란에서 휴양중이던 <귄란> 춘천교구장을 주한교황사절(主韓敎皇使節)로 임명하였으므로 <귄란> 주교는 이듬해 4월 23일 순난의 땅 한국으로 다시 오시어 이튿날 명동대성당에서 장엄대례미사를 집전한 감격이 오늘에 더욱 새롭다.
그리하여 춘천교구는 인자한 어버이를 다시 맞아 전란으로 황폐해진 시설면의 수복, 신설, 개척 등 눈부신 포교활동이 전개되어 38선 이북 휴전선(休戰線) 이남에 6개 본당이 설립되고 교구내 요충지에 허다한 본당이 이루어져 현재 26개의 본당과 3만7백여명의(1959년 통계)의 신도를 거느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