復活(부활)과 歷史(역사)
발행일1960-04-24 [제226호, 3면]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의 중심점이며 그 중추(中樞)를 이루고 있다. 역사의 주(主)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다. 한편 우리는 부활의 신비가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종교사상(思想)에 있어서 소홀히 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복음성경을 볼 때 그리스도의 공생활과 수난사적에는 주의를 기울이지만 부활은 그 부록같이 여기고 있는 듯 하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교를 비관적인 염세적인 것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종도들과 초대교회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전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 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을 두었는지 다시 우리는 이 점에서 주의를 집중시켜 성서를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서기 60년에 로마 관리 <췌스투스>가 예수를 지적할 때 오죽하면 『죽었던 예수라는 자를 <바오로>는 살아있다』고 하였을까. 종도들의 활동의 전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였다 이것이 그들의 모든 생활감정을 지배하고 있었다.
십자가는 그것으로만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수난은 부활로서 의의(意義)를 얻는 것이며 부활의 현실에 결실된다는 것은 예수께서 항상 제즈들에 강조하신 점이다. 수난과 부활의 내면적 관련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예고(豫告)를 보아도 알지만 더욱 부활 후 엠마우스로 가는 노상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에 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마땅히 수난을 받고 이로인하여 그의 광영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자신의 개선일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승리이다.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힘으로 이루어지며 그 힘은 이미 항상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인 성사로서 우리안에 있다. 인류의 한 부분이며 그 으뜸이며 창조의 관면(冠면)인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인류와 우즈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영화(靈化)된 신적존재양식(神的存在樣式)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고 또 저 먼나라에서 온 어떤 존재나 방사(放射)하는 힘이 아니고 그의 현존(現存)과 성총으로써 우리 안에 일하는 생명의 약동이다. 그리스도의 이 생활케 하는 활동은 자연계에서 현지하다. 천주의 광영이 나타나는 인간 안에 가시적(可視的)인 모든 창조의 총체(總體)는 천주의 성자의 출편을 고대하며 인간을 통해서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 안에 살고있으며 거기서 우주를 지배한다는 것은 또 우리의 개인과 인류의 역사 안에 살며 통어(統御)한다는 뜻이다. 『2천년전 이 지구의 한 구석에서 살다 사형법으로 매장(埋葬)된 그이가 오늘날 아직도 그의 위대한 원생명(原生命)을 우리들 사이에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산(生) 어떤 이난보다 더 생활하며 현대의 모든 고뇌(苦惱) 모든 인간적 협량(狹量)과 한계를 넘고 또 반목(反目)하는 국가와 민족 우리들의 사랑하는 자들의 묘혈(墓穴)을 넘어 오늘도 아직 그의 반찍이는 흰 성체(聖體)는 초연(超然)하게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있다. 그 만이 오직 모든 산(生)이와 죽은(死) 이를 가장 내밀(內密)히 일치시키며 그만이 우리의 참 고향이며 그만이 홀로 우리 영원의 생명임을. 우리가 눈에 볼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우리는 그를 더 명백히 볼 수 있으며 어떤 인간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있음을, 우리도 그의 친제자인만치 충성되어 그를 증거할 수 있음을, 진실된 그리스도교도의 삶은 종도(宗徒)들의 그 당대 피로써 증거한 바를 새로운 청명한 울림으로 외치는 것에 다름 없는 것이다. 그는 부활하셨다. 우리는 그의 증인(證人)이로다』
신앙을 잃음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현대인은 <파우스트>와 같이 자멸하려는 그 찰나(刹那)에 부활의 아침의 천상적 합창에 새로 다시 생명의 환희에로 다시 이끌려오고 있지 않느냐?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