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종한 「게리 쿠우퍼」
銀幕生活(은막생활) 30년에 여전히 主演男優(주연남우)
발행일1960-04-24 [제226호, 3면]
<요오크> 하사 역(役)으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후 <케리 쿠우퍼>의 인기는 지속되고 있다.
그는 「헤레나」시 <찰스 쿠우퍼>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린넬」대학을 중퇴하고 「헤레나」신문의 만화가로 5년을 지내고 「로스 안젤스」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역시 신문에 종사하였다.
주머니와 위장은 항상 비었었고 그러면서도 「헐리우드」의 끄나풀들과 상종할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액스트라」로 한번 나선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할 기연이 될 줄이야.
1931년 10월 건강을 잃은 그는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여기서 몇해를 머물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한편 그의 명성을 세울 수 있었던 수많은 쟝글의 영화를 내놓을 수 있었다. 『생활의 설계도』가 뉴욕에서 개봉되는 날 무대인사를 갔다가 그곳서 사교계의 여성 <베로니까 발프>를 만나 결혼하였다. (1933년 12월 15일) 그는 모범적 가정을 이어갔다.
지난 4월 「바티깐」 라디오 특파원은 <쿠우퍼>의 개종을 공개했다. 그는 성격상 자기의 개종을 떠들지 않았다. 『행복할 뿐입니다』라고 할 뿐. <쿠우퍼>의 처와 딸 <마리아>는 처음부터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그의 결심이 공개되자 『그가 마음을 정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읍니다』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간에서는 6년전 1953년 부부동반으로 비오 12세를 알견(謁見)한 후부터 개종의 준비를 하고 있은 것으로 보고 있다.
『배우 한사람에 대체 몇명의 일하는 사람이 따릅니까. 그분들의 수고로 영화가 되는게지요. 아무 사업에나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성공하는데는 반드시 남의 협조를 받아야 하지요』 그는 이렇게 무게있는 말을 하고 있다. (가톨릭다이제스트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