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春川(춘천)교구 編歷(편력) ②
시청각 동원한 교리지도
본당신부의 오후일과는 가정방문
번창하고 있는 춘천시내 두 본당
발행일1960-04-24 [제226호, 4면]
「약사리」재 마루턱에 『예수성심』의 주교좌성당이 홀연히 서서 강원도의 수도 춘천의 도심(都心)을 굽이보고 있다.
40년의 역사를 지닌 오랜본당이다. 「골롬반」회원이 처음으로 이 본당의 주임으로 온 것은 1938년 <토마스 귄란> 신부를 효시로서 1940년 12월 8일 춘천교구의 설정과 함께 주교좌성당이 된 것이다.
3천평의 대지에 2백평의 성당이 높은 구릉지대에 훤칠하게 서서 이 땅의 수호자(守護者)인양 존엄스러운 그 자세는 수고로운 시민들에게 평화와 위로와 신뢰의 촛점(焦点)이 되어있다.
6·25전은 간단없이 관혁이더니 동난이 벌어지자 인적(人的) 물적(物的)인 피해는 막심한 것이어서 그 아름답던 성당의 지붕은 산산조각이 되어버렸고 수복(收復) 당시 신자 수 불과 5,60명을 넘지 않는 쓸쓸한 본당으로 전락된 것이었으나 그러나 재건에 불타는 정열은 이 주교좌성당의 복구를 위해 비상한 노력이 경주되어 오늘에는 3천8백명을 넘는 국내에서 손꼽는 본당이 된 것이다.
비오는 강원도의 밤은 무척 쓸쓸도 한데 낭낭히 합송되는 만과의 시간이 한없이 밝아 보인다. 학생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음이 반갑고 기쁘다.
본당 주임인 <아터 막마한> 안(安聖道) 신부를 비롯하여 두 분의 보좌신부 <파트릭 도손>(손) 신부와 <브렌단 무레이> (함) 신부가 씩씩한 풍채로 성당에 들어 옴을 볼 때 그야말로 독불장군격으로 동문서주하는 딱하기 그지없는 본당에 비겨 우선 여유착착함을 느낀다.
『가톨릭시보』에서 라는 첫인사에 『감자바위를 사괴러 왔읍니까』라는 농섞인 대답. 생면부지건만 일면여구(一面如舊)다.
『춘천교구엔 스물 몇개의 감자밭(본당)이 있으니 작황(作況)을 보러 온겁니더』라고 기자도 역시 농섞여 수작.
이리하여 주인과 나그네 사이에는 유쾌했던일, 괴로웠던 일, 괴루움 중에서도 보람을 느꼈던 일을 속삭이기에 여념이 없는데 비오는 밤은 짙어만 간다.
『가는 가톨릭시보의 배달부』라고 안 신부는 뽐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일미사를 끝내고 신자들과 인사를 나눌 때 바로 신문을 손수 전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성실한 배달원!
성당 정문 바로 맞은 편이 『성골롬바노 수녀원』인데 성당과 함께 「약사리」재의 일대 위관이다. 그 북편 기슭에 1956년 설립된 『성골롬반의원』이 있다. 하루에 3백명 내지 4백명의 환자가 몰려들어 대부분이 무료치료를 받고 있는데 <마리아 다위다> 원장수녀를 비롯하여 의사수녀는 5명의 간호원과 더불어 진땀을 빼고 있다.
약효험이 신통하다 하여 도내는 물론 타도(他道)에서도 소개장을 지니고 찾아온다고 알려주는 전교회장 <바오로> 한(韓東洙)씨 말에 의하면 유료, 무료를 개의치 않고 고급약품을 마음껏 쓰고 있으므로 치료의 효험은 짐작할 수 있는 것이며 극진을 다한 초자연적인 친절은 완전히 환자의 마음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병마와 싸워 이기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 병원을 통해서 걷우어지는 영적 수확은 노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봉의 산중 허리에 자리잡은 성 <바드리시오>의 소양(昭陽)본당은 1949년에 설립되어 1957년에 <제임스 북클리> (부) 신부에 의해서 세워진 반원형(半圓形)의 성당으로 국내에서는 「모델 케이스라」하겠으며 2천6백명의 신자를 갖는 춘천교구 내의 손꼽는 본당이다.
7개의 「레지오 마리에」 「쁘레시디움」단원들이 꿀벌처럼 성실히 활동하는 한편 <부> 신부의 매일매일의 오후시간은 신자들의 가정방문으로 충당되어 있다.
13개의 공소를 순회하면서 「스라이다」를 통해서 또 교리를 녹음(錄音)하여 그야말로 시청각(視聽覺) 교리지도를 하고 있는데 전도사 <시릴로> 이(李德鉉)씨 말레 의하면 춘천시내에 36개의 예배당이 있으나 그 자체의 유지가 어려운 형편인데 가톨릭의 이와같은 발전은 오로지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며 종도전래의 권위와 성직자들의 성실에 연유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