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독일=NC】 동독의 가톨릭교회는 철권(鐵拳)적 공산주의의 치명적인 손아귀에 쥐어졌다. 적색 선전의 화선(火線)상에 놓여서 체계적인 지격과 포화(飽和)적인 폭격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괴상하게 비틀려서 동독의 가톨릭 수가 공산당의 집권 이전보다 2배로 불었다. 이제 「폴란드」인 정권 아래 있는 지역과 「첵코스로바키아」의 「수데텐란드」로부터의 「독일」인 추방이 「독일」의 「소베트」지역 안으로 백만 이상의 새 가톨릭을 가져왔다. 현재 「동독」의 전쟁 이전의 가톨릭인구가 80만을 초과하지 안했으나 현재의 동지역에서 총인구 천8백만에 대하여 가톨릭 인구가 백9십만에 달한다.
헌법상 종교자유의 정면 뒤에서 「동독」의 붉은 정권은 탄압과 박해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있다.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다 투옥되었다. 「독일」인 가톨릭 생활의 특수한 일면인 가톨릭 단체들이 금지되었다. 가톨릭학교들도 허가하지 않고 중고등학교와 국민학교에서 종교교육이 금지되었다. 가톨릭은 회의와 피정에 출석하려고 「소베트」 지대를 떠날 수 없다.
공산정권은 「서독」으로부터의 가톨릭신문과 잡지의 수입을 1949년에 금지했고 나중에 「서 베르린」에서도 못 가져오게 했다.
오랜 교섭 끝에 두 종류의 정기출판물이 허가되었다. 「동 베르린」 주간 「성 헤드위그 신문」과 「라이프찌히」 격주간 「주의 날」이다. 그러나 당국은 신문인쇄 배급을 빈약하게 하여 발행부수를 각각 2만5천과 10만으로 제한한다. 호마다 배달전에 검열을 받고 때로는 전판이 압수당하고 목서(牧書)의 공포도 할 수 없다.
「맑스주의」 공산주의의 기본 교의(敎義)인 유물 변증론을 국교(國敎)로 만드려는 정부의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견진예절을 대치하려고 계획된 「성년식」(成年式)에 뚜렷하다.
1958년 5월의 「동독」 주교들의 공동교서는 이렇게 성명했다. 『청년들이 성년식을 위한 선전으로 강화된 암제의 목적물이다. (이 예식에) 참례는 수의(隨意)라고 최고 당국자들까지 되풀이한 보장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압력이 성년기의 아동들에게 가해지고 있다. 이 예식에 참례를 거부한 자들은 그들이 취직하고자 할 때 차별대우의 대상물이 될 것이 명백하다.
1954년에 주교들이 이미 성명하기를 『성년식은 유물론적 이데오로기를 기초로 하므로 가톨릭 종교와 공존할 수 없다』고 했다.
4월 15일의 그들의 방송에 의하면 1955년에 「동독」에서 18%의 소년소녀가 『성년식』에 참례하여 『노동자-농민국가와 국제우의와 평화에 충성을 허원』했고 금년에는 그 참례자 수가 88%에 달한다는 것이다.
1958년에 「동독」 정부가 공산당식의 출생식, 결혼식, 장례식과 함께 성년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성사를 대치하려고 토의했다.
동년에 공산당 거시 겸 수상인 <발터 울부리히트>는 『사회주의 도덕 十계명』을 발표했다.
『너희는 노동계급의 국제연대성을 위하여 투쟁할지며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합작을 위하여 투쟁할지니라』
『너희는 너희 국가를 사랑할지며 온 힘을 다하여 노농정권을 방위할 각오를 지닐지니라』
그 제8계명은 『너희는 평화와 사회주의의 정신으로 너희 자녀를 교육할지니라』고 명한다.
1951년 그들은 「동독」밖에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안했다. 「동독」에 신학교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사제공급의 원천 고갈을 휘협한다. 동시에 사제부족이 「동독」교회의 큰 문제들 중의 한가지다. 사제수가 1천3백5심명으로서 신자 1천4백명당 1명의 비례다.
960개소의 본당과 4,000개소의 공소를 위하여 성당수가 겨우 650이다. 바락, 여관, 다른 교파의 교회당에서 미사를 지낸다. 「마이쎄」교구에서는 700개소의 「루터」파 교회당이 가톨릭을 위한 미사봉헌 장소로 사용될 정도로 「루터」파의 교역자들의 호의를 입고 있다.
2차대전 후에 전 「독일」 영으로부터 추방되어 압도적으로 쇄도한 「독일」어 사용 신자들이 「동독」 출신 사제들의 사무를 배가시켰다. 예를들면 「라이프치히」 근방 「차이츠」본당에서는 전쟁 전에 신자수가 2,000이었다. 이제는 156개소의 마을에 2만명이 살고 있다.
「삭소니」의 「마리에베르그」본당에서는 전쟁전의 900명이 이제 48개소 마을에 5천5백명이 되었다.
대전후 「동독」으로 이동해온 4백만 실향자(失鄕者) 중 백40만이 신자이었다. 고도로 가톨릭적인 「시레지아」 「그라츠」 「에름란드」 「수데텐란드」로부터의 수만명이 압도적으로 푸로테스탄트적인 지방에 낙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