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즈 싸강>의 초기(初期)의 두 작품 속에 쓰여진 몇 구절을 보면 우리는 이 여류작가의 사상과 그의 작품을 판단할 수 있다.
『나는 반성(反省)하는 습성이 없었다…… 나는 거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세실”과 “도미니끄”는 반성을 하려 하지 않고 직면(直面)하는 현실을 응시(鷹視)하려 하지 않는다. 참다운 날의 삶을 알려고 하지 않고 책임을 지려고 원치도 않는다.
『슬픔이여 안녕』은 “안느”가 그의 생활을 조정(調整)할 것을 강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세실”이 어떻게 조종(操縱)하는 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한갓 작난에 지나지 않는다. “안느”가 자동차 자살을 하는 불행으로 끝나는 작난인 것이다. “세실”과 그의 부친으로서는 이 죽음의 원인을 숙고(熟考)할 턱이 없다. 다만 『소갈머리 없는 급템포의 째즈』 속에 잠기어서 잊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모든 참다운 감정을 제거(除去)해버리고 반성이 따르지 않는 생활이 되 결코 절망은 아닌 것이다.
『거의 나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던 공허(空虛)…』 “세실”은 어떤 형태의 행복 속에 젖어버린 잔인하고 불신적(不信的)인 나어린 동물이다. 그 행복에는 쾌락이 사랑과 혼합(混合) 되고 이번에는 키쓰와 그리고 이튿날이면 잊어버린 달콤한 말들이 뒤범벅이 된다. “도미니끄”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녀는 모든 사람이 생존시 그 어느날에 가서 자신에게 꼭 다져보는 큰 문제에 관하여 자문자답한다. 『나는 인생에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하고자 원하는가』 그녀의 답은 이러하다. 『이에 대해서 나는 전무(全無)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던 그런 질문이다.』
“도미니끄”는 “세실”보다 동물적이 아니고 또한 본능적이 아니다. 마음의 어떤 반영(反映)을 그녀에게 있어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설혹 진부(陳腐)한 일이건 생활의 권태이건 간에 그것을 변경시킬 용기를 그녀는 갖고 있지 않다. 그녀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행동해 나간다. 그러나 “세실”보다 권태와 공허를 더 잘 인식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용기와 개성(個性)의 힘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값어치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결핍(缺乏)되어 있다.
『어떤 미소』에 끊임없이 나오는 아이로니 조롱(嘲弄) 무관심 막막하다. 슬픔 고독 절망이라는 따위의 어휘(語彙)는 양심의 마비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나는 권태스러웠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철저하게 산다는 것은 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가장 만족하기 위하여 몸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었다.』
『겨울을 향하여 그리고 죽음을 향하여 천천히 우리가 갈 것인… 이러한 인생인 기나긴 슬픔』이라는 어름짱 같은 생각과 탄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가슴이 오싹해지는 것이다. 『나는 희생해야할 아무것도 없었다 …… 아무런 희망도 ……』
열여덟살의 대학생인 “세실”과 “도미니끄”는 아직 아이들이다. 그들의 비극의 깊은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두 말괄량이들은 살기를 두려워한다. 그녀들은 적어도 자기들보다 스무살은 나이가 더한 남자들 그늘 아래 피난하고 싶어한다. (계속)
황교인 신부